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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사흘간의 동행] <13> 게리 무어 헌정콘서트 위해 뭉친 기타리스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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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사흘간의 동행] <13> 게리 무어 헌정콘서트 위해 뭉친 기타리스트들

입력
2011.04.06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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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그룹 사랑과평화에서 활동한 전설적 기타리스트 최이철(59)은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평생을 기타리스트로 살며 찢어질 듯한 전자음을 생산해 내는 엠프(스피커)를 벗해 온 대가다.

4일 오후 서울 양재동에 위치한 한 녹음실. 최이철은 자신의 펜더기타를 붙들고 상념에 잠겨 있었다. 자신의 몹쓸 귀 때문인가, 아니면 뭐 걱정거리라도 있나. 다 아니었다. “2월에 ‘세상에서 가장 슬픈 기타를 연주하는 사나이’ 게리 무어(59)가 저세상으로 갔잖아요.”

70년대 초 록그룹 스키드로우로 활동을 시작한 무어는 83년 구 소련 전투기에 의해 격추된 KAL기 사건을 비판한 ‘Murder in the sky’로 국내 팬들에게 유난히 친숙한 기타리스트다. 지난해 내한 공연 당시에는 천안함 사고로 허망하게 목숨을 잃은 장병들과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대표곡 ‘Still got the blues’를 부르기도 했다.

무어는 70, 80년대를 살아온 대한민국 기타리스트들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존재다. 제대로 된 교본 하나 없었던 당시 자신들의 이상향을 간직한 스승이자 기타리스트로의 삶을 살겠다고 집을 뛰쳐나올 때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엇던 우상이었다. 때문에 한국 기타리스트라면 무어의 곡 중 한두 개는 레파토리로 갖고 있다. 그의 곡 중에서도 ‘Empty room’과 ‘Always gonna love you’ 등은 동양적 감성 때문에 사랑이 특별했다. 최이철은 “동갑내기인 무어를 보면서 그와 똑같이 기타리스트자 보컬로 한 시대를 살아 왔어요. 그래서 그의 죽음은 절절한 아쉬움과 먹먹한 슬픔으로 남을 수밖에 없어요”라며 가슴을 쓸었다.

녹음실에는 한국에서 한 가닥 한다는 기타리스트들이 최이철에 이어 속속 도착했다. 최희선(50ㆍ조용필과위대한탄생) 김광석(56ㆍ히파이브) 한상원(51ㆍ한상원밴드) 김도균(46ㆍ백두산) 유병열(44ㆍ전 윤도현밴드) 손무현(43ㆍ외인부대) 이현석(42ㆍ솔로 활동) 타미김(39ㆍH2O) 박주원(31ㆍ솔로 활동) 등의 얼굴을 보였다. 이들은 이날 오지 못한 김태원(46ㆍ부활) 박창곤(39ㆍ이승철과황제밴드)과 함께 17일 무어 헌정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국내 이름을 알려진 기타리스트가 20명 안팎에 불과한데 12명이 콘서트에 동참했다. 70년대부터 지금까지, 또 펑크부터 블루스에 헤비메탈까지 세대와 장르를 초월해 기타리스트들이 하나로 힘을 합친 것은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이다.

참가자들은 무어와의 소중한 추억을 모두 한 자락씩 간직하고 있다. “고교 3학년 때 공부도 안 하고 하루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무어의 대표곡인 ‘Parisenne Walkways’ ‘dirty fingers’ 등을 기타로 카피하다가 졸업하자마자 기타리스트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집을 나가 서울로 홀로 상경했어요.”유병률은 이렇게 외로운 기타리스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음 날인 5일 자신의 스튜디오로 기자를 불러 준 타미김도 마찬가지. 그는 스튜디오에서 하루 종일 먹고 자며 앨범 녹음과 세션 작업에 몰두하고 있지만 무어가 없었다면 아마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열 살 무렵 TV에 방송되던 뮤직비디오에서 누군가가 빨간 펜더기타를 치는 장면을 봤어요. 뭔가에 머리를 심하게 가격당한 기분이었죠. 그때는 부유한 집이 아니고서는 기타를 친다고 하면 집에서 딱 두들겨 맞기 좋았는데 그 이듬해부터 기타리스트가 된다고 설쳤죠. 몇 년 전에 인터넷 동영상을 보다가 그 뮤직비디오의 주인공이 무어였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쇼크였죠.”

다시 4일 녹음실. 이들은 저마다 한국 기타리스트의 계보를 죽 늘어놓았다. 70, 80년대는 한국 대중음악 역사상 록 기타리스트들의 황금기라 할 수 있다. 70년대 초부터 미국 록밴드 문화가 주한미군 주둔지와 외국인특구 등을 중심으로 적극 흡수되면서 한국에도 밴드 문화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뮤지션들에게 ‘꿈의 무대’로 통하던 미8군 무대를 통해 기라성 같은 기타리스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김도균도 그랬다. “중학교 2학년 때인 79년 기타를 배우겠다고 미8군에서 연주를 하던 한국 밴드를 무작정 찾아가 배우기 시작했어요. 1년쯤 후부터는 대학생이라고 속이고 축제를 돌며 밴드 공연을 하러 다녔죠.” 김도균은 이후 3년 동안 미8군 밴드에서 기본기를 닦았다. 최이철은 그보다 10년 전인 69년 미8군 밴드에서 최고 스타 플레이어로 기타 연주를 시작했다.

70년대 초 서울 명동은 록 기타리스트들의 성지였다. 공연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이라 밴드가 주로 설 수 있는 무대는 라이브클럽으로 한정돼 있었다. 그 중 최고 실력파 기타리스트들이 올라가는 곳이 명동의 라이브클럽 오비스케빈이었다. “이 무대에 올라가기 위해 밴드들끼리 경쟁이 엄청 치열했어요. 사실 당시에는 뮤지션의 실력을 파악하려면 ‘너 어느 클럽 나가니’하고 물어 보면 됐어요.” 최희선의 설명이다. 70년대 중반부터는 무교동에 있는 나랑너랑 선비촌 등의 고급 클럽과 이태원동의 세븐클럽 등이 그 명성을 이었다. 최희선은 “당시 무대에 최고 스타가 최이철 김광석형이었어요”라고 회상했다.

70년대 말부터 밴드 문화의 정점은 다시 바뀐다. 국내 ‘록의 대부’ 신중현(73)이 이태원동에 라이브클럽 라이브를 개설하며 당대의 유명 기타리스트들을 모두 모았다. 김도균은 “당시 해군에 복무하던 김종진(49) 전태관(49) 등이 자주 놀러 왔었고 데뷔 전의 그룹 들국화와 조용필과위대한탄생도 자주 왔었어요”라며 “김태원의 그룹 부활도 공연을 하고 싶어서 오디션을 보러 왔었는데 그때 김태원은 요즘과 다르게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착한 대학생 같은 느낌이었어요”라고 말했다.

80년대 초부터는 이태원동의 태평극장을 개조한 라이브클럽 락월드가 그룹 시나위의 신대철(44) 등을 배출하며 그 문화를 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밴드 문화가 명맥이 끊어져 버린 것이다. 타미김은 “80년대 들어서며 이태원동에서 미국인이 빠져나가면서 밴드 문화의 산실이라는 위상을 상실했고, 클럽 문화도 점차 디스코 같은 춤추는 곳으로 바뀌면서 기타리스트들의 무대는 거의 없어졌어요”라며 “지금은 홍익대 앞이 있지만 그때와는 비교 불가능이죠”라고 설명했다.

사실 기타리스트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이 보컬의 그림자로 전락했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들린다. 90년대 이후 아이돌 가수를 중심으로 하는 댄서 문화가 발달하면서 밴드를 중심으로 하는 기타리스트는 보컬 가수의 녹음을 위한 세션 말고는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기타 드럼 베이스 등의 음을 만들어 내는 미디어 기기에 밀려 더욱 어려운 처지에 몰리고 있다. 이번 행사를 기획한 공연연출가 김기룡(43)씨는 “기타리스트들이 대중과 호흡하지 못하고 자기만족적인 앨범에 그치는 경향도 문제이긴 하지만 대중매체의 댄서 가수에 대한 편식이 몰락의 가장 큰 이유”라며 또 “미국, 일본 시장 등에 비해 록 장르에 대한 수요가 너무 적은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래서 이번에 이들이 마련하는 무어 헌정 콘서트의 또 다른 의미는 ‘기타리스트가 주인공이 되는 무대’다. 이번 공연을 통해 세계적 기타리스트인 산타나나 슬래쉬 같은 기타리스트를 국내에서도 배출하기 위해 힘을 모아 보자는 것이다. 김도균은 “세시봉 열풍 때문에 낙원상가에서 통기타가 없어서 못 판다고 하는데 이제 통기타 정도면 대중들이 아무런 부담 없이 받아들일 정도는 된 것 같아요. 이번 콘서트를 시발점으로 전자기타도 막 팔렸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이들은 20년 전 발족한 레코딩뮤지션협회도 활성화할 계획이다. 협회는 기타 드럼 등 세션을 하는 뮤지션들의 인접 저작권(음악이 방송 등에 나갔을 경우 세션을 하는 뮤지션들도 저작료를 받을 수 있는 권리) 등을 보장해 나가기 위해 설립됐다. “지금껏 인접저작권은 사실상 유명무실했는데 이런 것부터 하나하나 개선해 나가 후배 기타리스트들이 자신들의 음악을 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야죠.” 이번에 협회의 회장을 맡은 최희선의 꿈이 꼭 이뤄지길 기대한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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