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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만든 쪽방촌 은행, 희망의 싹 틔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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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만든 쪽방촌 은행, 희망의 싹 틔우다

입력
2011.04.06 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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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철(52)씨는 지난해 4월 연부조직 암 선고를 받았다. 12년째 쪽방살이하는 기초생활수급자(월 43만원) 처지라 구청 지원금 300만원으로 수술은 받았지만 한번에 70만원이 드는 항암치료는 언감생심이었다. 혹시나 하고 은행도 여러 차례 찾았지만 대출이 힘들다는 말만 들었다. 그 사이 암세포는 머리에서 폐로, 손쓸 수 없을 만큼 퍼졌다.

"돈 없는 사람, 아프면 그냥 죽어야지." 좌절하던 최씨에게 그런데 한 줄기 빛이 비쳤다. 수입도 담보도 없고 건강도 잃은 그에게 선뜻 무담보대출을 해주겠다고 나선 건 정부도 대기업도 아니었다. 그가 사는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촌의 '사랑방마을 공제협동조합'(이하 사랑방조합)이었다. 최씨의 부인 이경희(42)씨가 1년 전부터 남편도 몰래 쌈짓돈 10만원 정도를 적립해둬 조합원이 된 덕분이었다.

최씨는 그렇게 지난달 19일 출범한 사랑방조합의 첫 수혜자가 됐다. 조합의 최대 대출금액은 50만원. 한 차례 항암치료비도 안 되는 돈이지만 최씨 부부에게는 천금보다 귀했다. 최씨는 지난달 25일 항암치료를 받았다. 급한 불은 껐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래도 조금 더 살 수 있게 됐잖아요. 감사합니다. 길은 또 열리겠죠." 최씨는 평안해 보였다.

사랑방조합은 지난해 4월부터 조합원을 모았다. 각자 형편에 따라 계좌당 5,000원씩 최대 10계좌까지 매달 꼬박꼬박 납입한 181명의 조합원들에 의해 1,000만원이 적립됐고, 지난해 11월에는 기금 마련 주점을 열어 500만원을 보태 출자금은 1,500만원이 됐다.

조합의 운영 방식은 간단하다. 10만원 이상 적립한 조합원은 급전이 필요할 때 최대 50만원까지 연 2%의 저리로 돈을 빌릴 수 있다. 최씨를 포함해 지금까지 대출은 받은 주민들은 7명. 대출자격은 엄격하다. 술을 마시거나 도박자금으로 사용하려는 이들에겐 한 푼도 빌려주지 않는다. 의료비나 임대주택보증금에 한해서만 대출이 가능하고 일단 빌린 돈을 갚아야만 재대출이 가능하다.

쪽방촌 주민들을 십시일반으로 뭉치게 한 것은 절박함이었다. 독거노인, 일용직노동자, 장애인 등 기초생활수급자가 대부분인 이곳 주민들은 은행 등 제도권 금융기관에서는 돈을 빌릴래야 빌릴 수가 없다. 정부가 만든 햇살론 등 서민대출도 딴 나라 얘기다. 기초생활수급자들은 일반 통장에 저축도 못한다. 소득이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그나마 받는 수급비마저 깎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래서 '우리들만의 은행 설립' 필요성엔 공감했지만, 처음에는 쉽게 서로 마음을 내주지 않았다. "내 돈 들고 튀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팽배했고, 조합 출범도 전에 무작정 돈을 빌려달라고 행패를 부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태헌(55) 조합 이사장은 "그럴수록 신뢰를 강조했다"고 말한다. 교복 사업을 하다 실패한 후 6년이나 노숙인으로 거리를 떠돌다 2003년부터 이곳에 정착했다는 그는 "어려운 사람끼리 서로 돕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호소했다.

주민들도 시나브로 변해갔다. "평소 술을 많이 마시는 아저씨가 생활비가 떨어졌다며 15만원을 빌려달라고 해요. 미심쩍어 하면서도 믿어야지 하며 돈을 건넸죠. 알고 보니 군에서 첫 휴가 나온 아들에게 밥과 옷을 사줬대요. 빌린 돈은 이틀 간 공사장에서 일해서 다 갚았죠." 이 이사장은 "제가 믿어주는 만큼 주민들도 달라지는 게 보여 뿌듯하다"며 울먹이는 듯 웃음을 지었다.

이제 주민들은 조합을 일종의 보험이라고 여기며 의지한다. 부모가 버리고 간 손자 넷을 돌보고 있는 유모(78)씨는 "아이들 아플 때 대비해 1명당 2만원씩 계좌를 개설했다. 한 달 내내 폐지를 팔아 번 돈 8만원을 조합 사무실에 내러 가는 날이면 부자가 된 것처럼 밥 안 먹어도 배부르고 든든하다"고 했다. 그렇게 조합원 181명은 차곡차곡 미래를 저축하고 있다.

사랑방조합은 희망을 키워나가고 있다. 더 많은 주민들에게 더 많은 돈을 대출해주기 위해 경기 고양시 덕양구 화전동 일대에 150만원을 주고 산 500평 규모의 땅에 대파, 감자 등을 심어 판매할 계획이다. "돈 없는 사람들은 아픈 걸 가장 무서워합니다. 의료 생협을 만드는 게 꿈입니다." 이 이사장의 말에 주민들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윤주 기자 k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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