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준비제도(Fed 혹은 FRB) 의장을 18년 동안 지낸 앨런 그린스펀은 금융시장을 지휘하는 '마에스트로'로 불렸다. 그의 명성은 "그가 말하면 시장은 듣는다"는 말에서 잘 나타난다. 반면 '건설적 모호함'이라는 그의 독특한 화법에 대한 악명도 높다. 시장이 그의 얘기를 정성껏 들어도 정확한 메시지를 읽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그가 미 하원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했을 때 어떤 의원이 "무슨 얘기인지 잘 알겠다"며 감사의 뜻을 표시하자 "그렇다면 내가 말을 잘못했군요"라고 대꾸했다는 일화는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된다.
■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유명한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 기자는 이런 그린스펀을 신전에서 제사를 올리는 '제사장'에 비유한 적이 있다. 고대 국가에서 전쟁과 농사 등 국가의 운명이 걸린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신의 뜻을 전하는 제사장의 판단과 입이 조심스러웠던 것처럼, 혼란스럽고 변덕스런 금융시장을 관리하고 조율하는 Fed 의장의 입 역시 모호하고 은유적인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실제로 그린스펀은 주요 통화정책을 결정해야 할 순간이 임박하면 머리보다 배가 먼저 알아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복통을 앓았다고 한다.
■ 그래도 그린스펀은 Fed의 비밀주의를 벗기는 데 적잖이 공헌한 인물로 꼽힌다. 1913년 출범한 Fed는 20세기 후반까지도'비밀의 사원(secret temple)'이라고 불렸다. 기준금리를 처음 공개한 1994년 이전엔 대중과 시장은 Fed가 금리를 올리는지 내리는지 공개시장조작 결과를 보고 사후에 알 뿐이었다. 그런 Fed가 2000년대에 들어서 금리 결정배경을 설명하는 짤막한 성명을 발표하고 이어 회의록까지 공개하게 된 것은 대단한 진전이다. 하지만 그린스펀도 언론과의 접촉은 절대 금기시했다. 잘못된 전달보다는 모호함이 낫다는 판단에서다.
■ Fed 100년의 비밀주의 전통이 마침내 깨진다고 한다. Fed의장이 1년에 분기별로 4차례 통화정책 언론 브리핑을 정례화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올해는 이달 27일과 6월22일, 11월2일 등 3번으로 예고됐다. 벤 버냉키의 Fed가 그린스펀의 그늘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모호함 대신 투명함을 중시하겠다는 선언이다. 시장에선 찬반이 교차하지만 기대가 훨씬 강하다. 세상은 이렇게 변하고 있다. 엊그제 한국은행이 김중수 총재 취임 1년을 맞아 방대한 치적자료를 내놓았다. 하지만 '불통 중수'라는 별명을 벗지 못하는 것만으로 이런 치적은 빛 바랜다.
이유식 논설위원 ys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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