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팔순을 맞은 소설가 이호철씨가 6일부터 매주 수요일 격동의 한국사를 관통했던 자신의 인생과 문단의 풍경을 회고하는 '이호철의 문단골 60년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1950년 함경남도 원산시에서 월남한 이씨는 1955년 '탈향'으로 등단한 후 분단 현실을 다룬 단편 '판문점'(1961) '닳아지는 살들' (1962) 등으로 분단 문학을 일궜고 1970~80년대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대표 등을 맡아 민주화 운동에도 앞장 섰으며 1974년에는 문인간첩단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지난 달 11일에 나는 80세 생일잔치를 치렀다. 80세란 나이가 어떤 나이인가. 나는 1955년부터 오늘까지 만 56년 간을 줄곧 소설가로 살아 온 체험을 쓰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웬 '80세 타령'인가 의아하게 여기겠지만, 80세란 나이부터 새삼 곱씹지 않을 수가 없다.
80세 잔치를 치르기 며칠 전 우리 언론이 그 일을 보도하자, 곧장 우리 집 수화기에 메시지 하나가 떴다. 인용하면 이렇다.'지면을 통해 건강한 모습을 보니 반갑고 다행스럽습니다. 저는 1974년 서빙고 분실(국군 보안사령부)에서 병사로 근무 할 때 '문인간첩사건'으로 조사를 받는 선생님을 뵈었습니다. 몹시 힘 들었을 터인데, 그 상황에서도 선생님의 해맑은 모습, 의연한 모습이 마치 얼마 전인 것 같은데요. 선생님, 오래오래 건강 하십시오.'
나는 즉각 그 전화번호를 돌렸다. 청주였다. 그리고 당일 3월 11일에 초로의 모습으로 꽃 바구니 하나를 들고 행사장까지 그이가 올라왔다. 혼자서 가만히 따져 보니 꼭 37년만의 만남이었다. 순간, 나는 혼자서 화닥딱 놀라버렸다. 뭐? 37년!!
그 때 1974년, 43세 때를 돌아보면 바로 어제 겪었던 일처럼 떠오르는데, 이게 37년 전이었다고? 그이는 스무살 안팎의 새파란 신병으로 보안사에 근무했으니까, 지금은 환갑 전후겠고, 그리고 그렇지, 우리의 일제 식민지 시절이 꼭 36년이 아니던가. 뭣이라고? 정말로 그렇네!
그렇다면 일제 치하 36년이라는 것도 별거 아니었네 머. 그러니까 그 때,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70세로 고국으로 돌아올 때의 느낌이 지금 내 느낌 같았겠군. 1974년이 어제처럼 느껴지듯이, 그이도 미국서 지낸 36년이 바로 이런 느낌으로 별거 아니었겠군. 김구 선생을 비롯해 중국에서 환국했던 이시영 신익희, 미국 쪽에서 돌아온 임병직 윤치영 임영신, 국내에 있던 송진우 김성수 여운형 등 우리 정계 요인들의 느낌도 대동소이 했겠군 싶었다.
이 느낌은 80세가 아니면 도저히 맛 볼 수 없는, 심지어 죽었다가 깨어나도 결코 체험이 불가능했던 경험이었다. 지나간 36, 37년이라는 세월이 이렇게도 지척 간으로 느껴질 수 있는 경지, 이거야 말로 80세의 구체적인 뜻이고 80세가 되어서만 느낄 수 있는 어떤 인생국면이 아닐까.
우선 50여년 전의 일을 회고하기에 앞서 1950년대 마지막 2년 간의 중요한 연표(年表)를 한번 보자.
1958년 1월 29일 주한 미군, 핵무기 도입 정식 거론. 2월 7일 중화인민공화국, 주한 외국군 철수 제의. 2월 19일 미 국무성, 불철수 공식 성명. 3월 중순 북한 천리마 운동 시작. 5월 2일 4대 민의원(국회의원) 선거. 7월 2일 진보당 사건, 조봉암 양명산에 징역 각 5년 선고. 8월 8일 함석헌 필화로 구속.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 조봉암, 양명산 사형 선고. 11월 18일 국가보안법 국회 제출, '보안법 파동' 시작. 12월 24일 새 국가보안법과 1959년도 예산안, 여당의원만으로 국회 통과(일컬어 2ㆍ4 파동). 12월 28일 야당, 국민주권사수투쟁위원회 발족.
1959년 1월 15일 새 보안법 발효. 1월 22일 반공청년단 결성. 7월 30일 조봉암 재심청구 기각. 다음 날 조봉암 사형 집행.
어떤가. 격세지감인가, 아니면 그 때나 지금이나 어슷비슷해 보이는가. 내가 보기엔 팽팽하게 맞선 남북관계나 우리네 정치권 안의 기본 생리는 어슷비슷해 보이지만 그 자잘한 면에선 격세지감이다.
가령 요즘이면 조봉암이 대법 판결이 난 이튿날로 곧장 사형 집행을 당했을까. 하지만 그렇게도 무시무시한 그 때에도 반공투쟁위원장 장택상이나 야당 대변인 조재천 같은 사람이 당국 처사에 맞서 나설 수 있었던 점이 매우 주목된다. 그런 맥(脈)이 연면하게 이어져 김일성 부자 일원체제 일변도로 굳어져온 북한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 남쪽의 오늘과 같은 활기를 담보해 냈던 것이 아니었을까.
문화 일상생활 면은 어떠했을까. 1958년의 유행을 보면 당구장 훌라후프 한글간판 텔레비전 등이 눈에 띄고 의상에서는 색드레스와 페티코트, 유행어는 치맛바람 피아노표 공갈마 깡패 '썩은 정치 바로 잡자' 등이었다. '청포도사랑'이 히트 유행가였다. 이듬해는 우표수집 필터담배 등이 유행했고, '돌았다' '복도 많지뭐유' '형광등' 등이 유행어, '산장의 여인' 이 히트곡이었다.
더듬어 보면 오늘의 사회 문화 생활환경은 그 때 그것의 연장선임을 여지없이 확인하게 된다. 요컨대 우리 삶의 기본 패턴은 추호도 달라진 게 없었던 것이다.
50년대 시인이며 현대문학사 기자였던 박재삼씨의 18번 노래는 '굳세어라 금순아' 였다. 1933년생이던 그이도 1997년쯤에는 60대 중반으로 집에서 병환으로 요양 중이었다. 어느 날 소설가 홍성유씨가 무슨 글인가를 쓰다가 '굳세어라 금순아'의 가사를 적어야 할 대목이 있어 수소문 하던 끝에 누군가가 그 노래라면 박재삼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자정 가까운 한 밤 중인데다 중환자인 것을 아는 터라 망설이다가, 조심조심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즉각 박재삼이 받았다. 병환 중이라지만 정신만은 말짱했다. 이만저만 해서 전화를 걸었노라고 하자 박재삼은 전화 통에다 대고 어눌한 발음일망정 노래를 하기 시작했고 홍성유도 한 쪽 귀에 수화기를 댄 채 받아 적었다. 하지만 받아 적는 게 늦어 "다시 다시"하며 처음부터 부르도록 몇 번씩 채근했다. 이렇게 2절까지 갔으니 시간도 어지간히 걸렸을 것이다.
그러자 박재삼의 집에서 생 야단이 났다. 자정 가까운 시각에 중환자라는 사람이 전화 통에다 대고 '굳세어라 금순아'를 거푸 불러대고 있으니 당연히 그랬을 밖에. 말짱하던 정신까지 이제는 홰까닥 가 버린 것이 아닌가 하고 온 식구가 달려들어 만류하였다던가.
세상 흘러온 것이 필경은 이런 것이고 우리는 지금 죄다 웃고 있지만, 이런 것이 더도 덜도 아닌 사람살이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대강 1950년대의 끝 머리를 흘낏 보면서 어떤 감회를 느끼는가. 더 행복해졌다고 느끼는가, 아니면 더 불행해졌다고 느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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