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칼'은 끝났지만… 나는 영원한 기자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특종기자이자 명칼럼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던 고 제임스 레스턴은 언론인을 이렇게 정의한 적이 있다. "보기에는 큰소리 치는 멋진 직업처럼 보이지만, 마감시간을 앞두고 숨이 막히는 나날을 보내는 존재"라고.
지금은 이화여대를 이끄는 재단인 이화학당 이사장으로 변신했지만, 언론인 장명수(69ㆍ전 한국일보 상임고문)도 48년을 그렇게 보냈다. 특히 자신의 이름을 내건 최초의 여기자 칼럼인 '장명수 칼럼'은 과도하지도, 현학적이지도 않은 평범한 언어로 보통사람들의 상식을 담았지만, 그 메시지는 우리 사회에 날카롭고 묵직한 물음을 던지면서 통괘했다. 그래서 그의 칼럼은 '장칼'로 불렸다.
그는 기자를 '숙명'으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여성 언론인 최초로 주필을 역임했고 신문사 사장 자리까지 오르기도 했으나, 자신은 영원한 기자로 남기를 원했다. 신문의 날(7일)을 앞둔 1일 그를 만나 기자의 길, 신문의 사명에 대한 고견을 들었다.
_ '장칼'이란 애칭은.
"그 별명이 생긴 건 이렇다. 1982년 7월 '여기자 칼럼'을 시작했을 때 한국일보 견습 동기들이 붙여준 거다. '장명수'와 '칼럼니스트'에서 한자씩 딴 건데, 나중에는 칼럼이 칼로 찌르듯 날카롭다는 뜻도 갖게 됐다. 독자들에게까지 그 애칭이 알려졌다. 당시는 한국일보의 전성기였고, 나는 입사 19년 만에 칼럼니스트가 되고 싶었던 꿈을 이룬 만 40세의 기자였다. '장칼'은 그 아름다웠던 시절 동료들이 달아 준 자랑스런 훈장이다."
_거의 50년 동안 언론인으로 외길을 갈 수 있었던 비결이라면.
"한평생 외길을 갈 수 있는 힘은 자신의 일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6ㆍ25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다음해인 54년 서울 이화여중에 입학했다. 입학식에서 '거울'이라는 학교신문을 받았다. 유엔에서 원조하는 종이를 얻어다가 주간으로 발행하던 '거울'을 읽으며 기자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지금도 여전히 좋아한다."
_기자 인생이 진행형이라는 의미인가.
"그렇게 여기고 있다."
_기사나 칼럼을 쓰면서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거나 타협한 적은 없었나.
"이제서야 고백한다. 나는 기자생활의 반 이상인 30여 년을 군사정권 아래서 보냈다.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진실을 외면하거나 써야 할 기사를 쓰지 못한 적이 많다. 사소한 일로 잡혀가서 고문당하는 동료들을 보며 등골에 식은 땀이 날 때도 많았지. 언론의 자유와 책임에 대해서 배워야 할 때 무사하게 살아남는 방법을 배워야 했다."
_뜻밖의 얘기다.
"이런 고백을 하고 나니 50여 년 기자생활이 행복했다는 앞의 대답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변명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_권력의 언론통제는 필연인가.
"권력은 항상 언론을 통제하고 싶어한다. 본능이다.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권력과 재벌은 언론이 자신에게 불리한 기사를 쓰지 않도록 압력을 가하고 끊임없이 유혹한다. 군사정부의 탄압은 보다 단순했다고 말할 수 있다. 언론이 그 싸움에서 이기려면 자기통제와 절제가 외부의 통제보다 더 강해야 한다."
_언론의 자기통제에 대해 좀 더 설명해달라.
"언론의 힘은 독자들의 신뢰에서 나온다고 본다. 언론 스스로 힘이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국민의 신뢰가 반사적으로 언론의 힘이 된다. 군사정부 시절 우리는 언론의 자유만 있으면 얼마든지 좋은 신문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억압에 순치되고 안주했던 언론은 막상 자유를 가졌을 때 몸집에 어울리는 성숙한 정신을 갖지 못했음이 드러났다. 신문과 방송들은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필요한지를 가리지 못한 채 선정주의와 속보 경쟁에 빠져서 언론의 격을 스스로 실추시킬 때가 많다. 인터넷에 흘러 넘치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독자들이 신문에 바라는 것은 바른 판단과 의견이다."
_언론의 선정주의를 지적하는 것인가.
"그렇다. 선정주의 경쟁에서 벗어나야 한다. 언론은 판단과 견해의 경쟁을 하는 게 옳다. 오늘 우리 신문들은 종이 신문의 위기와 신뢰상실의 위기를 함께 겪고 있다."
_왜 위기라고 보나.
"신문이 위기인 이유 중 하나는 너무 신문이 많다는 것이다. 언론 스스로의 문제가 굉장히 크다는 뜻이다. 사실 군사정부 때는 비위만 맞추면 정부에서 광고를 나눠줬기 때문에 언론사의 경영은 꽤 괜찮은 편이었다. 물론 언론의 자유를 양보한 아픔은 있었지만. 하지만 민주화 이후 광고가 전반적으로 힘들어지면서 신문들이 더 어려움을 겪게 됐다. 신문사 스스로 설 힘을 키우지 못해 문민정부 시대가 되면서 오히려 어려워진 측면이 많다."
_활로는 없을까.
"신문들이 이제 선택을 해야 할 것 같다. 권위지로 남겠다든지, 선정주의로 가서라도 많은 독자들을 잡겠다든지. 그냥 모두 권위지라고 주장하다가 큰 사건이 나면 막 물어뜯고 주워담고, 이게 현실이다. 이번에 일본 대지진 사태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더라. 기자들이 과거에 비해 정확한 정보를 많이 전해주고 촘촘한 기사를 쓰는 것은 사실인데, 기자의 판단이나 견해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단순히 누구는 이렇게 얘기하고 누구는 저렇게 얘기했다는 식의 기사는 곤란하지 않나. 방송하고 신문기사를 읽으면 허우적대는 느낌이 든다. 정보는 인터넷에서 쏟아져 나오는데, 인터넷과 경쟁하려면 신문만의 수준 높은 견해를 가져야 한다. 그런 견해를 가진 기자는 종이신문이 없어지더라도 필요성이 커지는 법이다. 그런 기자의 판단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여전히 많다."
_리포터가 아닌 저널리스트를 강조하는 건가.
"당연하다."
_기자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인가.
"그렇다. 우수한 기자, 바른 판단과 뛰어난 견해를 가진 저널리스트들이 매체의 수준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종이신문의 미래가 없다고 해서 저널리스트의 미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_요즘 신문의 이념적 양극화가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신문마다 자기 입장을 가질 수는 있다. 그렇지만 자기 신문의 이해관계로 노선을 이용하는 것은 큰 폐단이다. 진보지들은 보수가 집권하면 우리신문은 어떻게 될까라든지, 보수는 진보한테 정권이 넘어가면 우리신문은 망한다든지, 이런 판단을 갖고 움직이다 보니 여러 부작용이 생기는 거다. 어떤 경우엔 신문이 아니라 삐라 같은 느낌이 든다. 이건 아니다."
-언론 환경이 이명박 정부 들어 악화됐다는 얘기가 있다.
"별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_언론의 자유가 위축된 측면이 있지 않나.
"동의하기 어렵다. 그건 광고시장 악화, 뭐 이런 것과 맞물려서 그렇지, 현실적으로 정부가 언론을 통제해 나쁘게 만들 영향력은 없다고 생각한다. 약점이 많은 자들이 그게 두려워서 미리 떠는 그런 상황은 있을지 몰라도,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_방송사 낙하산 인사는 여전히 논란이다.
"10년 전을 생각해 봐라. 소위 진보사장 등에 대한 보수 쪽의 원성이 자자하지 않았나. 그렇지만 이 정부 들어 다 바꾸려고 하는 건데, 그 부분에 대해선 유감이다. 원수 갚듯이 모조리 바꿔야 했는지. 어느 한쪽에서는 진보의 목소리도 반영했어야 하는데, 모든 소리가 묵살됐다. 무조건 바꾸려고 하는 욕구, 그런 건 좀 지나쳤다고 생각한다."
_과거 정부에서 여러 차례 입각 제의를 받은 것으로 들었다. 매번 거절한 이유는.
"그건 뭐 자기 직업이 좋으니까 안 간 것이지."
_몇 번이나 제안 받았나.
"(손사래를 치며)그 얘기는 하고 싶지 않다. 기자가 왜 관직에 안 갔는지 궁금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관직이 더 낫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 같으니까. 기자라는 직업이 다른 직업과 비교해 옮기지 않을 만큼 좋았기 때문이지. 안 하겠다고 하면 두 번 다시 그 쪽(청와대)에서 연락하지 않더라."
_언론인의 정치 참여가 옳지 않다는 소리로 들린다.
"그렇진 않다. 언론인이 많이 참여해 좋은 정치가 이루어지면 좋은 것 아닌가. 단지 기자라는 자리를 이용, 정치인이 되는 경우는 순수하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_언론계를 떠나 이화여대의 재단이사장을 맡았다.
"순전히 교육 때문이다. 나는 교육의 위대함을 믿고 있다. 또 이화는 나의 모교다.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것은 중ㆍ고교와 대학의 교육이었다. 125년 전 미국의 선교사 메리 F. 스크랜톤 여사가 세운 이화는 한국 최초의 여학교로 교육을 통해 여자들이 인간답게 사는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또 여학생들에게 '내가 받은 교육의 혜택을 다른 사람들과 나눠야 한다'는 정신과 '이 세상에 여자라고 못할 일은 없다. 여자는 잘난 존재다'라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내가 여성 차별이 심한 언론계에서 차별에 굴하지 않고 낙관적인 마음으로 장거리 경주를 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모교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요즘 여학생들은 남녀공학을 선호하지만, 나는 나의 경험을 통해 여대의 강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여대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 같다.
"이사장이 된 후 이화여대 목동 병원의 여성암 전문병동에 간 적이 있다. 병동에 들어서자 머리를 빡빡 깎은 20여 명의 여성들이 오가거나 환담하고 있었는데, 나는 잠시 여성문제를 다룬 뮤지컬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여성전용 병동에서 머리를 모자로 가릴 필요도 없이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여성들을 보면서, 편안함과 자매애가 느껴졌다. 나는 아직도 여성교육에서 이런 자매애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은 자신이, 또는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가 겪었던 차별의 경험을 통해 이 세상의 문제를 파악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고, 어떻게 그 문제들에 접근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성의 차이를 넘어 소외된 사람들에게 연대감을 느끼며 다가가는 능력도 있다. 번영과 평화,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지구촌의 공동목표를 향해서 여대가 크게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_요즘 신문을 너무 안 읽는다.
"인터넷이 급속도로 보급됐기 때문이다. 70대 주부들이 인터넷으로 정보를 뽑아보는 나라가 또 있을까. 하지만 정보만 갖고 살 수는 없다. 견해와 주장을 가져야 한다. 한 평생 글을 써온 칼럼니스트들의 생각이 어떤지 알아야 성숙한 시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인터넷의 많은 정보를 꿰고 있어봤자 나열된 정보에 불가할 뿐이다. 정보 이상의 견해를 가지려면 종이신문을 봐야 한다."
_다시 기자 시절로 돌아와보자. 기억에 남는 일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그 현장을 함께 취재했던 기억이 가장 깊게 남아있다. 광장에서 물밀듯이 동독 사람들이 밀려 내려와 한없이 걸었다. 그 속에서 한국사람들이 울면서 걷는 것도 봤다. '우리도 금방 통일이 될 거다. 그 사람들이 부럽다'는 얘기를 하면서 서로 눈물을 흘리던 장면이 기억난다. 글쎄, 우리 통일도 금방 올 지. 통일이 계획해서 오는 게 아니라 갑자기 오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고."
_취재 현장에 다시 뛰어들고 싶다는 말로 들린다.
"내가 몇 살일 때 통일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그 현장을 취재하고 싶은 생각은 늘 든다. 만일 그게 불가능하다면 현장을 취재하는 후배들을 부러워할 것 같다. 통일 취재는 꼭 하고 싶었는데. 모르지 뭐, 또 기회가 있을지."
_김대중 정부 때 언론사 사장단의 일원으로 방북,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는데, 어땠나.
"인터뷰는 안 된다고 했지만 식사 때 대화가 이루어질 것을 대비, 기자 출신의 신문사 사장들은 수십 장의 질문지를 갖고 갔다. 식사 때 헤드테이블에서 사장들이 쉬지 않고 질문을 했는데 김 위원장이 아주 노련하게 대답을 잘 받아넘기더라. 사적인 얘기, 국제 정세 등을 가리지 않고 질문이 나오는 데도 잘 받아넘기고 나름대로 유머러스 했다. 그래서 돌아와 '김 위원장이 머리가 좋은 것 같다'고 한 특강에서 얘기했었는데, 보수 쪽에서 친북 좌파라고 욕을 하더라. 기자 입장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기자를 안 했다면.
"글쎄 모르겠다. 한번도 생각 안 해서. 중학교 때부터 신문기자를 하려고 했기 때문에 기자가 제일 좋은 것 같다."
_우리 언론계는 지금도 여기자에게 차별적인가.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차별적이다. 언론계의 주류는 남자이기 때문에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남자위주의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경우가 많다."
_구체적으로 말해달라.
"불과 30여 년 전만 해도 우리 신문들은 정신대 문제를 '민족의 수치'라고 생각해 보도하지 않으려 했고, 가정폭력은 가정문제라고 인식했다. 여기자가 늘어나면서 여기자에 대한 차별도 줄어들었고, 언론이 세상을 보는 시각도 균형을 찾게 됐다. 그러나 채용단계에서부터 여자에 대한 편견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_언론계 후배들은 생생한 조언을 듣고 싶어한다.
"요즘처럼 직업이 많은 시대에 기자가 되겠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은 뭔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기자 지망생들은 대개 돈보다는 보람을 중요시하고, 옳은 편에 서서 세상을 바꾸겠다는 꿈을 꾸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그들이 좋고, 연대감을 느낀다."
_기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뭔가.
"기자는 힘든 직업이지만 일생을 걸고 해 볼만한 직업이기도 하다. 앞에서 말했던 신문의 자기통제와 절제는 기자들에게도 당연히 요구된다. 특히 나는 여기자일수록 한번 쓰러지면 재기하기가 어렵다고 본다. 그래서 여기자는 원칙과 정도를 지키면서 가는 게 중요하다. 이걸 지키다보면 처음엔 참 힘들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나중엔 가장 큰 힘이 된다. 기자의 직업정신은 원칙과 정도다."
-지난 2월25일자로 마지막 '장명수 칼럼'을 썼는데 특별한 감회가 있었나.
"유감스러웠다. 가장 유감스러웠던 것은 50년 기자로 일했던 사람이 이 정도의 글밖에 쓸 수 없는가라는 점이었다."
_독자들은 그런 평가를 안 하는데.
"50년 경력의 목수라면 이런 솜씨로 일을 마감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칼럼이라고 생각하면 좀 슬프다. 일시 중단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스스로 잘 썼다고 생각되는, 50년 일한 사람의 경력에 걸맞는 칼럼을 몇 편이라도 더 쓸 수 있었으면 하는 희망을 갖고 있다."
_기회가 닿으면 칼럼을 재개하겠다는 생각인가.
"칼럼은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 장명수
1942년 충남 천안 출생. 서울 이화여고와 이화여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다. 63년 한국일보 견습기자(16기)로 입사, 주로 문화부 기자로 활동했다. 종합일간지 사상 첫 여기자 기명칼럼, 첫 여성 주필, 첫 여기자 출신 사장이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여성 언론인으로서 활발한 사회 활동과 정곡을 찌르는 칼럼을 인정받아 제3회 한국여성지도자상 대상(2005년)과 삼성언론재단의 제8회 삼성언론상(2004년)을 수상했다. 지난 3월 이화여대 재단인 이화학당 이사장에 취임했으며, 2006년부터는 이화여고 총동창회장도 맡고 있다.
인터뷰=김진각 편집위원 kimjg@hk.co.kr
정리=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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