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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tory] 책 밖에 모르는 우리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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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story] 책 밖에 모르는 우리 아이

입력
2011.03.31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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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밖에 모르는 우리 아이? 영재 아닌 병을 키우는 겁니다!

“민준아, 오늘 기분 어때?” 언어치료사의 물음에 다섯 살 민준이가 중얼거리듯 답한다. “불현듯 그런 예감이 들었던 거죠. 하지만 그는 원통하게 누명을 쓰고 죽었어요.“ “민준아, 그게 아니고 기분이…” 언어치료사의 질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민준이는 제 할 말만 쏟아낸다. “거참,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군요. 짐짓 쓰러진 시늉을 하고 숨어있었을 뿐인데요.”

김수연(39ㆍ가명)씨는 지난해 봄 아들 민준이가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쯤 보육교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민준이가 다른 아이들과 전혀 못 어울린다. 좀 이상한 것 같으니 병원 진단을 받아보라”는 내용이었다. 사내 아이라 말이 좀 늦었지만 책을 3,000권이나 읽었을 정도로 영민했던 아이라 기분이 언짢았다. 그래도 혹시 하는 마음에 병원을 찾았다가 김씨는 그만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듣고 말았다. 민준이에게 ‘유사자폐’ 진단이 내려진 것이다. 문어체 문장을 중얼거리는 민준이의 행위는 뇌가 성숙하지 않은 아이에게 텍스트를 주입한 결과, 의미는 전혀 모르면서 기계적으로 문자를 암기하게 된 ‘초독서증(Hyperlexia)’ 증세였다.

영어 수학에 이어 독서에도 조기 교육 붐이 일고 있다. 생후 6개월부터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아이에게 다량의 책을 읽히는 ‘조기 다독’ 트렌드가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에서는 엄마들이 육아 블로그에 아이 독서 리스트와 누적 독서량을 일기로 남기는 ‘리딩 트리’가 유행하고 있고, 수백~수천 권에 이르는 유아 대상 필독 전집 리스트까지 나돌고 있다. 심지어 하루에 70~80권의 책을 읽는 두 돌배기 아기, 1만권에 육박하는 전집 어린이 도서로 거실을 어린이도서관처럼 꾸민 집들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같은 과잉 조기 독서 붐으로 인해 유아들 사이에 유사자폐 환자가 늘어나고 있다.

전문가들은 유아기 다독이 오히려 아이의 뇌를 심각하게 손상시킬 수 있다고 경고한다. 뇌과학자인 서유헌 서울대 의대 교수는 “뇌가 성숙하지 않은 아이들에게 과도하게 독서를 시키는 것은 가는 전선에 과도한 전류를 흘려 보내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과부하로 전선에 불이 나는 것처럼 아이들의 뇌 발달에 큰 지장이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신의진 연세대 의대 소아정신과 교수도 “요즘 불고 있는 유아 대상 독서 열풍은 너무 심각한 수준일 뿐 아니라 매우 잘못된 것”이라며 “유아기에는 책 대신 온몸으로 정서적 교감을 많이 하는 것이 최고의 육아법”이라고 강조했다.

● 유사자폐란…

생후 초기부터 증상을 보이는 선천적 자폐와 달리 부모의 양육 태도에 문제가 있을 때 서서히 나타나는 자폐 증세. 처음에는 말이 늦고, 주변 사람에 무관심하거나 변화를 두려워하는 등 사소한 증상을 보이지만, 방치할 경우 발달이 떨어져 유치원이나 놀이방 생활이 불가능해진다. 세 돌 전에 부모의 사랑과 보호, 관심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지속적 스트레스, 과도한 학습 강요 등에 노출되는 것이 원인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박철현기자 karam@hk.co.kr

■ 세살배기가 한글 줄줄… 가슴 뿌듯하다 가슴 치는 부모들

43개월 사내 아이 한새(가명)는 두 돌 전에 영어 알파벳과 한글을 읽기 시작했다. 돌 무렵부터 읽어주기 시작한 그림책 덕분이었다. 한새는 장난감도 싫어했고, 일과 시간의 대부분을 책만 보며 지냈다. 글자를 뗀 후엔 초등학교 3학년 형의 '어린이사전' '영어사전'까지 탐독했다.

소통이 불가능한 아이

주변에선 "영재"라고 했지만 엄마 이민혜(38ㆍ가명)씨는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이 불안했다. 두 돌이 넘도록 한새가 자발적으로 할 수 있는 말이 거의 없었기 때문. "엄,마" 하면 "엄,마" 하고 겨우 따라할 뿐이었다. 책이 보고 싶으면 엄마 손을 이끌고 책장 앞으로 갔고, 목이 마르면 냉장고 앞으로 끌고 갔다.

간혹 또래 아이들과 모이면 혼자 등을 돌리고 책만 줄줄줄 읽어대는 모습에 이씨는 억장이 무너졌다. 억지로 아이들과 섞어놓으면 한새는 하고 싶은 말을 못해 답답해 하며 짜증을 냈다. 엄마로서 소아정신과는 내키지 않았다. '말이 좀 늦는거겠지' 하며 애써 자위하다 병원을 찾은 게 36개월 때. 병명은 '경계성 자폐'(유사자폐)였다. 한새의 독서는 의미도 모른 채 낭독만 능숙한 전형적인 초독서증이었다. 이씨는 가슴을 쳤다.

"애가 똑똑한 것 같다는 생각에 너무 많은 자극을 줬어요. 온종일 책만 읽혔고, 한글 영어 비디오 너무 많이 보여줬고…. 혼자는 못 사는 세상인데, 친구 하나 못 만들어준 게 너무 미안하고 가슴 아파요."

이씨는 요즘 집에서 책을 모두 치우고 아이와 바깥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고 있다. 하지만 한새는 아직 나라 이름과 수도, 국기 외우기가 취미를 못버렸다. 지하철을 타면 노선도를 외우고 놀이공원에 가면 안내도를 외운다. 다행히 병원에 다니기 시작한 뒤 제법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시키지 않아도 하는 자발어도 많이 늘었다. 하지만 질문을 반복하는 반향어는 여전해서 "물 줄까" 물으면 대답 대신 "물 줄까"를 따라하기만 한다.

때가 돼도 못 걷는 아이

서른여덟에 첫 딸을 낳은 김지영(41ㆍ가명)씨는 육아에 관심이 많았다. 늦게 낳은 아이 잘 길러보려는 욕심에 처음 책을 읽어준 게 생후 6개월 무렵. 인터넷 육아 사이트와 블로그들을 보면 돌도 안 된 아기부터 유치원생까지 책의 바다에 빠진 아이들이 즐비했다. 김씨도 210만원에 전집 네 질을 들였다. 남편은 돌도 안 된 애기한테 무슨 책을 사주냐고 반대했지만, "이렇게 해야 나중에 사교육 따로 안 한다"는 아내 말에 고집을 꺾었다. 그렇게 읽은 책이 10개월에 500권, 두 돌 때는 1,000권이 넘었다.

아이는 생후 10개월부터 책 중독 증세를 보였다. 기저귀 갈고 젖 먹는 시간 외에는 하루 종일 책만 찾았다. 엄마가 목이 쉬도록 읽어주면, 아이는 동공도 움직이지 않은 채 새벽 4~5시까지 책을 들여다봤다. 아이가 이상해졌다고 느낀 건 첫 돌이 지났을 때부터. 똘망똘망하고 모든 사물에 관심을 보이던 애 눈빛이 흐리멍덩해졌다. 때가 돼도 아이가 기지 않고, 돌이 지나도 걷지 못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유명 육아사이트는 그런 현상에 대해 "이렇게 몰입할 수 있다는 게 영재성의 증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기뻤어요, 이 미련한 엄마가. 책만 많이 읽으면 똑똑해진다는 말만 믿고 애를 망가뜨린 거죠."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책을 딱 끊은 게 두 돌 때. 한 눈에 보아도 다른 아이에 비해 신체 발달이 뒤떨어진 아이는 세 돌이 다 되도록 혼자 계단을 서너 개밖에 올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평범한 또래의 일상으로 돌아가자, 그저 많이 놀아주자, 애쓰고 있어요. 제가 책을 안 읽히겠다 마음 먹으니까 희한하게도 책에 빠져있던 아이가 금세 책에서 멀어지더군요. 아이들은 엄마의 눈빛을 통해 엄마가 뭘 아는지 온몸으로 간파하는 거예요. 그간 내가 아이를 학대했구나, 온몸으로 책 읽기를 강요 했구나 싶어 아이를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져요."

공격성이 끓어오르는 아이

명문대 출신의 주부 박유리(36ㆍ가명)씨는 최근 딸 은서(5ㆍ가명)를 데리고 소아정신과를 찾았다. 얼마 전 은서가 "엄마도 죽이고 싶어. 할머니도 찌르고 싶어. 나는 나쁜 애야"라고 소리지르는 모습에 놀라 진료실 문을 두드렸다. 의사는 "과잉독서 때문에 아이가 공격성 조절을 못한다"고 진단했다.

박씨는 은서가 이유식을 먹을 때부터 책을 읽어주었다. 세 살부터는 도서관도 자주 다녔다. 무엇을 해줘야 할지 몰하 택한 것이 책 읽어주기였지만 감정적 소통을 해야 할 시기의 책 읽기는 아이에게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 "책을 읽어주면 그저 좋은 줄로만 알았어요" 엄마는 생후 5년 동안 은서를 구명 조끼조차 입히지 않은 채 책의 바다에 방치한 것을 뒤늦게 후회하고 있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박철현기자 karam@hk.co.kr

■ 한국 유치원만 '나홀로 문자교육'

올해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한 홍민경(35ㆍ가명)씨는 담임 교사로부터 반 아이 중 한글을 모르는 게 자신의 딸뿐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주변 학부모들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가 “학습지 하나 안 시키고 뭐했냐”는 타박만 들었다는 홍씨는 “초등학교 때부터 읽기, 쓰기를 배우도록 되어 있지 않냐”며 “외눈박이 원숭이 나라에 와 있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정한 교육과정에 따르면 유치원에서는 읽기, 쓰기를 가르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유아기에 독서는 물론 국영수까지 배우는 것이 대세다. 그러나 이는 해외에서는 유례가 없는 현상이다.

정병오 좋은교사운동본부 대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읽기, 수학, 과학 등 모든 영역에서 1, 2위를 하는 핀란드의 경우 유치원 단계에서는 문자 교육이 금지돼 있다”며 “이 시기에는 집중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한데 문자 교육이 오히려 집중력을 해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일권 한국특수교육연구소장도 “대부분의 유럽 국가는 취학 전 문자, 수 교육이을 금하고 있고 일부 국가는 위반 시 처벌한다”며 “영재교육법으로 유명한 이스라엘도 유치원에선 문자나 수를 안 가르친다"고 설명했다.

김미정(35)씨는 영국에서 자녀를 유치원에 보낼 때 아이에게 알파벳과 숫자를 가르쳤다가 담당 교사로부터 “잘못된 교육”이라는 경고를 받었다.

엄정애 이화여대 유아교육과 교수는 "태어나자마자 영어니 독서니 교육 경쟁을 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 정도였는데 일본에서는 최근 독일 등의 자연주의식 유아교육법이 정착되어가는 추세"라며 "기본적인 인지능력도 떨어지는 아이에게 문자나 수를 주입하는 것은 정서 발달에도 안 좋고 교육 효율성도 떨어진다"고 말했다.

박철현기자 karam@hk.co.kr

■ 인터뷰/ 신의진 연세대 의대 소아정신과 교수

'나영이 주치의'로 유명한 신의진 연세대 의대 소아정신과 교수느 "유아들에게 많은 책을 읽히는 것은 돈 들여 아이를 망치는 일"이라며 "적어도 5세까지는 책도 읽히지 말고, 문자로 가르치지 말고, 그냥 놀게하라"고 조언했다.

_부모들은 독서가 조기 교육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기 독서가 왜 문제인가.

"조기 교육 바람이 휘몰아친 게 외환 위기 이후인 2000년 무렵부터다. 처음엔 영어 비디오로 시작해 몇 년 후엔 한글과 수학, 그 다음엔 한문, 그리고 최근엔 독서로 넘어왔다. 환자들을 보면 조기 교육의 종류나 도구만 바뀔 뿐 똑같다. 일찍 가르치면 똑똑해질거라는 믿음에 잘못된 학습을 시키는 거다. 독서는 아이들이 글이나 그림을 통해 추상의 세계를 다루는 것이다. 장난감 만지는 것과 책을 보는 것의 제일 큰 차이는 장난감은 실체인 반면 책은 실체의 상징, 즉 심볼을 다룬다는 점이다. 따라서 머리 속에서 심볼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나이가 언제인가가 중요한데, 최소 세 돌은 넘어야 한다."

_그 전에는 독서가 불가능한가.

"심볼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게 돌부터다. 이때의 심볼은 말이 심볼이지 아주 단순한 것이다. 두 돌이 지나면 인형놀이 정도를 슬슬 시작할 수 있고, 적어도 세 돌이 돼야 자기 상상을 얹을 수 있다. 글을 보고 제대로 독서를 하는 것은 초등학교 2, 3학년부터다. 이것도 빠른 여자 아이들 얘기다. 의외로 글을 통해 추상의 세계로 진입하는 시기는 굉장히 늦게 찾아 온다."

_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으면 커서 똑똑해지는 것 아닌가.

"최근 몇몇 연구도 있었지만 그것은 독서의 효과라기보다는 부모가 그만큼 자녀한테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신경 쓴 덕분에 아이들이 공부 잘하는 것을 '책을 읽어줘서 머리가 좋아졌다'로 잘못 해석한 것이다."

_책을 뺏으면 난리치는 아이들도 많다.

"병이 시작된 거다. 두 가지 부류인데, 어릴 때부터 책을 너무 많이 읽혀서 생긴 집착증이거나 아니면 아이 인생에 그것 외에 재미있는 게 없는 거다. 둘 다 가슴 아픈 일이다. 세상에 재미있는 게 너무 많아야 하는 초등 2, 3학년 이전 아이들이 책에 집착하면 그건 뭔가에 대한 증상이다."

_조기 독서로 유사자폐가 되기도 하나.

"만 3세까지 발달하는 뇌 부위는 감정조절, 충동억제, 교감, 공감 등을 담당하는 변연계다. 요즘 책 좀 읽는다는 아이들은 생후 6개월부터 읽기 시작하던데, 이때부터 독서를 과다하게 하면 사람들과의 정서적 교감이 상당히 부족해진다. 다른 사람과 내가 통한다는 느낌을 갖지 못하면 사회성 발달이 저해되고, 사회인지가 떨어진다. 나중엔 의사소통이 안 되고, 쓸데없는 거나 외우려고 한다. 정서를 조절하는 뇌가 자극을 받지 못해 제대로 못 큰 탓에 유사자폐가 된다. 유사자폐는 서 너살때 발견하면 거의 100% 치료된다. 하지만 초등학교 때 오면 (치료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_어떻게 해야 아이를 똑똑하게 키울 수 있나.

"3세 이전에는 아기의 창의성을 죽이는 작업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미 만들어진 자극(ready-made stimulus)은 안 주는 게 좋다. 끈, 냄비, 풀만 줘도 아이들은 무한한 상상력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부모들은 아이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길 원하는지 잘 생각해봐야 한다."

박선영 기자 aurevoir@hk.co.kr

■ 조기 독서 부추기는 전집 마케팅

육아 관련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을 훑어보면 흔히 접하는 학부모 간 대화 중 하나가 '전집 VS 단행본'을 주제로 한 '바른 독서 교육' 공방이다. 한쪽은 "아이의 독서 습관은 충분한 양적 노출이 있을 때 질적으로도 성장한다"며 전집을 옹호하고, 다른 쪽은 "자율적인 독서 습관이 중요하다"며 단행본 구매를 권한다. 이 논란은 출판계의 교묘한 전집 마케팅에 휘말린 부모들의 실태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유아기 과다 독서의 부작용을 이야기할 때 한국 출판업계의 독특한 현상인 전집 열풍이 빼놓지 않고 거론되는 이유다.

유아기 과다 독서의 폐해를 줄이려면 전집 출간에 편중된 우리나라 아동 출판 시장의 재편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최대 3조원대로 추산될 정도로 시장 규모가 큰 아동 전집이 사교육 열기와 맞물리면서 양적 독서 경쟁을 부추기는 주범으로 꼽히고 있기 때문이다.

아동 전집은 특정 주제로 여러 권의 책을 묶어 간행한 영ㆍ유아 및 초등학생 대상 출판물이다. 방문 판매나, 출판사 지정 판매점 또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적게는 30권~80권 세트 단위로 판매되기 때문에 일반서점에서 낱권으로도 파는 시리즈물과는 구별된다.

아동 전집은 1960년대 일본 번역본을 중역한 형태로 우리나라에 처음 등장했다. 이후 성장을 거듭하면서 시장 규모가 단행본의 6배까지 확대됐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과 총판 및 방문 판매 매출액, 홈쇼핑 판매액 등을 토대로 산출한 아동 전집 시장은 최대 3조원대에 이른다. 반면 대한출판문화협회 출판 통계를 통해 살펴본 지난해 아동 단행본 시장은 약 4,590억원(아동 신간 발행부수×평균정가×2배(중쇄)) 규모에 불과하다. 이동 전집 시장이 단행본의 6배 이상 되는 규모인 것이다.

아동 서적 출판업계, 특히 이를 주도하는 아동 전집의 시장 지배력이 커지면서 마케팅의 힘이 품질 논리를 압도하는 흐름이 강화했다.

"규모의 경제를 적용, 충분한 자본과 기획력을 들인 양서를 만든다"는 논리는 명분에 그쳤다. 오랜 시간 공들여 책의 품질을 높이기보다는 '신상'(신상품)을 자주 선보이는 게 유리한 상황이 되다 보니 아동 전집의 생산 주기는 점점 짧아졌다. 출판사들이 내놓는 전집은 더 이상 '두고두고 보는 책'이 아니게 됐다.

우려되는 것은 출판사의 새 전집 개발이 소비자 요구가 높은 분야에 집중되면서 학습서 성격이 두드러진 제품으로 편중돼 가고 있다는 점. 이 때문에 전집이 '다양성'이라는 태생적 배경과 달리 획일적 구성으로 흐를 가능성이 놓아지고 있다. 여을환 어린이도서연구회 이사는 "학습 지향적인 독서를 권하는 유아 대상 전집을 반복적으로 접하다 보면 아이가 독서로 내면을 살찌우는 게 아닌 학습의 과정으로 한정해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다.

전집 위주의 아동 서적 출판 시장의 문제점에 대해 출판인들은 아동 서적을평가하고 비평하는 기능과 활동이 활성화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림책 전문 잡지 '그림책상상'의 김수정 편집장은 "전집, 단행본 가릴 것 없이 학부모들이 자신의 판단보다 마케팅에 휘둘려 아동 서적을 구입하는 것이 문제"라며 "방문판매인의 역량에 따라 지역마다 인기 있는 전집이 다를 정도"라고 말했다.

아동문학평론가 조은숙씨는 "전집의 경우 인터넷 반응과 이웃의 조언, 카탈로그를 구매 판단의 절대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많다"며 "출판업계가 아동 전집을 사생아처럼 방치하지 말고 다변화한 책 소비 체계로 수용해서 소비자의 바른 선택을 도울 수 있도록 비평 기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 현은자 성균관대 교수의 '바람직한 그림책 읽기를 이끄는 학부모 진단 체크리스트'

-그림책이 어린이만을 위한 책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아이에게 읽어주는 그림책과 내가 읽고 싶은 그림책은 서로 다르다.

-그림책을 읽으며 서양 그림책과 우리 그림책의 차이를 느껴본 적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그림책 제목을 10권 이상 열거할 수 있다.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그림책이 있다.

-내가 특별히 좋아하는 그림책 작가가 있다.

-그림책을 읽으며‘캐릭터의 생각과 느낌이 어쩌면 이렇게 나와 똑같을까’놀란 적이 있다.

-그림책의 짧은 지면에 축약된 즐겁고 놀라운 생각에 감탄한 적이 있다.

-나도 캐릭터와 같은 행동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캐릭터에서 내 아이와 주변의 아이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림책을 읽으며 미소 짓거나 크게 웃어본 경험이 있다.

-그림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린 경험이 있다.

-그림책에서 인생의 통찰이나 진리를 발견하곤 한다.

-책의 내용과 어울리는 음악이나 노래가 생각나곤 한다.

-책의 분위기가 특정 계절과 어울린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적어두고 음미하고 싶은 문장이나 구절을 발견한 적이 있다.

-다른 일을 하다가 문득 언젠가 읽었던 그림책의 내용이나 글이 생각날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토론하고 대화하고 싶은 그림책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고 싶은 그림책이 있다.

-다른 엄마들과 함께 그림책 동호회를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이 있다.

-인터넷이나 잡지, 신문에 실린 그림책 비평을 읽고 있다.

-그림책을 구입할 때 비평을 읽고 구입하는 경우가 있다.

※해당 항목이 많을수록 자녀의 독서를 강요된 학습 독서가 아니라 하나의 즐거운 놀이로 이끌 가능성이 높은 학부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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