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공약(公約)들이 번번이 공약(空約)이 돼 사라지고 있다. 국회의원과 지방자치단체장들의 공약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국민을 상대로 내놓은 대선 공약들도 줄줄이 파기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 공약을 어겨가며 세종시 수정안을 추진하다 좌절한 데 이어 이번에는 동남권 신공항 건설 공약을 백지화시켰다. 지켜보는 국민들은 허탈하다. 역대 대통령의 잇단 허언에 "믿고 찍었는데"라고 되뇌며 분을 삭이지 못하는 민초들도 있다.
앞으로는 지키지 못하거나 경제성이 없는 공약을 제시해 논란을 일으키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표(票)만을 의식해 공수표를 남발하는 '포퓰리즘' 정치 풍토는 극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대통령이나 자치단체장, 국회의원들이 선거 때 무책임하게 내놓은, 경제성 없는 건설 사업 공약을 추진하느라 국가나 자치단체 재정에 엄청난 부담을 안기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대선 공약 파기의 뿌리는 깊다. 노태우 정부 이후 사례만도 수두룩하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87년 대선 막판에 임기 중 국민에게 신임을 다시 묻겠다는 '중간평가'를 약속했다. 하지만 당선 후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에서 야당과의 비밀 합의를 통해 중간평가를 무산시켰다.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1992년 대선 때 쌀 개방 불가를 공약했지만 93년 우루과이 라운드 합의로 쌀 개방을 선언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에서 내각제 추진을 약속했지만 집권 후 이를 철회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행정수도 이전을 약속했으나 위헌 판결로 이를 지키지 못했다.
이런 공약들은 "우선 당선되고 보자"는 심리에서 비롯됐다. 이명박 대통령도 지난 2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충청권 유치 공약에 대해 "(당시) 충청도에서 표를 얻으려고 제가 관심이 많았겠죠"라고 말했다.
진정성 없는 공약 제시에 따른 피해는 국민이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 세종시 수정 문제로 반년 이상 온 나라가 들썩였고, 동남권 신공항 문제로 영남은 양쪽으로 나뉘어 감정 싸움을 벌였다. 사회적 갈등 비용은 천문학적인 규모일 것이다. 집권자의 리더십 훼손, 국정운영 불신 증폭 등 무형의 비용도 적지 않다. 결국 타당성과 합리성을 따지지 않고 채택된 공약은 국가적인 독배(毒杯)가 되는 셈이다.
헛공약을 없애기 위해서는 정치인, 유권자 모두 변해야 한다. 특히 유권자들은 공약의 실현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예산 뒷받침이 가능한지를 반드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정희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정치인들이 먼저 자세를 바꿔야 한다"며 "책임 있는 정책과 비전 제시를 통해 정치인이 성장하고 신뢰를 받는 풍토를 조성해야 후진적 정치문화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섭기자 youn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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