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초와 뱀파이어가 만났다.
혜초는 신라시대 인도와 이스탄불, 당나라를 다녀온 승려. 723년 나이 열아홉 청년이 대담하게도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걸어 새로운 세상을 알렸다. 디자이너 장광효(51)씨가 본 혜초는 "한국 최초의 글로벌 인재"다.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의 패권 다툼을 그린 영화 의 배경은 도시다. 밝고 활기찬 도시가 아닌 어둡고 차가운. 디자이너 최지형(34)씨가 본 뱀파이어는 도시인의 어둡고 차가운 이면을 대변하는 존재다.
이들 디자이너가 옷으로 그려낸 혜초와 뱀파이어는 서울 강남구 대치동 서울무역전시장(SETEC)과 복합문화공간 크링(Kring)에서 28일부터 6일 동안 열린 춘계 서울패션위크에 처음 선보였다. 국내 최대 규모 패션쇼를 앞둔 25일, 한국 패션계의 오늘을 이끌어 온 관록의 선배와 패기의 후배가 강남구 청담동 장광효갤러리에서 만났다.
과거 패션은 사치조장업?
장광효씨: 1,300여 년 전 사람이죠, 혜초가. 세계여행 하면 흔히 떠올리는 마크로 폴로보다 훨씬 앞섰어요. 그 진취적인 정신과 열정을 현대 남성들에게도 전하고 싶어요.
최지형씨: 영화에서 푸르스름한 보름달이 뜬 밤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는 뱀파이어 여전사 이미지가 강렬했어요. 지난 시즌의 컬러풀한 색상 트렌드와 정 반대 느낌이죠.
패션디자이너에게 컬렉션(패션쇼)은 상상력의 경연장이다. 선후배를 막론하고 수많은 눈 앞에 그 상상력의 결과물을 펼쳐 보이는 건 긴장 그 자체다.
장: 국내외 합쳐서 쇼만 100번 넘게 했어요. 지겹게 했죠. 그래도 하면 할수록 마지막에 인사하러 나갈 때 발이 안 떨어져요. 요즘처럼 큰 쇼 직전엔 밤에 자다 깨다 해요. 수천 명의 기대심리에 대한 책임감이겠죠.
그래도 장씨는 우리나라에서 서울패션위크 같은 큰 무대가 자리 잡았다는 데 자부심이 있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이런 무대, 국내에선 꿈도 못 꿨다.
장: 1980년대 선배 디자이너들과 함께 도쿄컬렉션을 보러 갔죠. 당시 일본에서 디자이너는 아티스트였어요.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죠. 돌아와선 디자이너들이 돈을 모아 작은 쇼를 하기 시작했어요. 지금의 서울패션위크 전신을 만든 셈이죠. 90년대 초 처음 파리컬렉션에 참가했을 땐 외국서도 국내서도 우리는 낯선 존재였어요. 외국 디자이너들은 우릴 동료로 여기지 않았고, 국내에선 사치를 조장한다며 세무조사까지 했으니까요.
시대의 변화, 기회? 위기?
상황은 점점 나아졌다. 패션도 국가경쟁력이라는 인식이 확산됐고,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디자이너들의 해외 진출을 돕기 시작했다. 서울시가 지원하는 서울패션위크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가 디자이너에게 기회만은 아니다. 위기이기도 하다.
최: 최근 4~5년 사이 패션시장이 크게 변했어요. 유통채널이 다양해져 소비창구가 늘었죠. 소비자들이 많은 옷을 접하고 쇼핑이 활성화하면서 스타일링이란 말이 등장했어요. 예전엔 소비자들이 특정 브랜드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는데, 지금은 자기가 좋아하는 디자인이면 브랜드 관계 없이 구매하죠. 그렇게 산 옷으로 소비자들은 자신만의 스타일을 직접 연출해요. 결국 소비자에게 디자이너 고유의 역할을 많이 내주게 된 거죠.
장: 우리 디자이너들 실력, 외국에 비해 탁월해요. 단추 다는 것부터 그림 그리는 것까지 1인 다역을 척척 해내죠. 하지만 이젠 옷 만드는 실력 말고도 갖춰야 할 게 많아졌어요. 대인관계와 홍보, 마케팅 경험이 많이 부족해요.
소규모 매장 몇 개를 운영하는 국내 디자이너가 홍보와 마케팅, 외국 디자이너들과의 네트워킹까지 손 대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다. 이에 서울시는 지난해부터 매년 '글로벌 패션브랜드 육성사업'으로 디자이너 10명을 선정해 파리컬렉션 참가 비용과 현지 마케팅을 지원하고 있다. 그 중 최우수 평가를 받은 1명은 스타디자이너로 발굴돼 다음해에도 연속 지원을 받는다. 최씨가 바로 그 스타디자이너로 처음 발굴됐다.
최: 예전엔 패션을 하려면 무조건 유학 가 현지에서 이름을 알려야 한다고들 생각했죠. 지금은 달라요. 외국 유명 디자이너 대부분이 자국에서의 기반을 바탕으로 성장하고 있어요. 문제는 우리나라엔 서울패션위크 말고는 디자이너를 꿈꾸는 사람들이 도전할 수 있는 다른 기회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에요. 외국엔 중소 규모의 다양한 트레이드쇼가 있죠. 그런 행사에선 패션쇼뿐 아니라 판매부스도 활발히 운영돼요. 자기가 만든 옷을 직접 걸어두고 팔면서 실질적인 비즈니스를 배우는 거죠.
편집매장이 뜨는 이유
패션은 예술이자 산업이다. 두 디자이너는 글로벌 패션디자이너를 키우려면 내수산업도 든든하게 뒷받침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장: 국내 내수시장의 가장 큰 단점으로 지적돼온 게 바로 백화점 임대매장입니다. 디자이너 이름을 걸고 백화점에 입점한 뒤 세금과 수수료 내고 나면 오히려 손해를 보는 구조가 된 지 오래죠. 때문에 단독매장을 열고 비즈니스를 하는 브랜드가 점점 사라졌어요. 결국 임대업 중심의 내수산업이 국내 디자이너의 경쟁력을 떨어뜨린 원인이 됐다고 봐요.
최: 그래서 요즘 패션계에선 새롭게 편집매장(셀렉트숍)이 각광받고 있어요. 상품기획자(MD) 역량에 따라 다양한 국내외 브랜드를 선별해 소량씩 들여와 판매하는 거에요. 한 매장에서 한 브랜드만 팔던 예전과 확 달라진 형태죠. 최근 우리 브랜드도 편집매장에 들어가고 있어요. 그 안에서 다른 브랜드와 어떻게 경쟁해 차별화할 수 있을지 현실적인 전략을 세울 수 있죠. 특히 신진 디자이너가 처음부터 단독매장을 내는 건 도박에 가까우니까요. 하지만 아쉽게도 아직 편집매장 수가 많진 않아요.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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