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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plus/ 인터뷰 - 꽃의 아름다움을 세밀화에 담는 이상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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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e plus/ 인터뷰 - 꽃의 아름다움을 세밀화에 담는 이상훈씨

입력
2011.03.31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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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땀 한땀의 정성과 끈기가 깃들인 명품이 이태리 장인의 전유물은 아니다. 침처럼 가늘고 뾰족한 0호짜리 세필 붓으로 돋보기를 대고 한붓 한붓 찍어가듯 그리는 그림, 그게 세밀화다. 집중력과 인내, 그 만큼의 땀내가 필요한 세밀화는 장인정신이라 이를 만한, 예술과 노동의 어느 접점에서 이뤄지는 집념의 작업이다.

그 현장을 보기 위해 29일 충북 단양군 장발리를 찾았다. 제천IC를 나와 지방도를 30여분 달려 이른 곳은 소백산 줄기의 산세가 너울거리듯 굽이쳐진 한적한 시골. 지방도를 빠져 나와 고샅길을 또 한참을 올라가서야 10여 채 가옥들이 오밀조밀 모인 소샛골이 나왔다. 예전 같으면 첩첩 산중 오지 동네였을 텐데, 그래도 포장도로가 깔려 있고 지난해부터는 휴대폰도 터진다고 하니 핍진한 오지라기 보단 목가적인 면모가 그윽하다.

기자가 찾은 곳은 2002년께부터 9년여를 세밀화 작업에 매진해온 이상훈(38) 작가의 작업실. 생태도감, 그림책, 동화책 등의 그림 작가로 등 20여 권의 책을 낸 그는 한국 세밀화 분야의 중견이다. 2009년에는 소설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최성각씨의 생태소설 의 그림도 맡았다.

사물에 대한 극한의 탐색과 재현

전날 거의 밤샘 작업을 했다는 그는 기자의 방문 탓에 잠을 자지 못해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그의 하루 작업 시간은 12시간. 그렇게 그려 A4크기의 그림 한 장을 완성하는 데만도 사흘 이상이 걸린다. 극세밀화를 그릴 때는 한 장을 그리는데 한 달까지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씨는 "요즘 요통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데, 세밀화 그리시는 분은 저처럼 다 병 하나씩 몸에 달고 계실 겁니다"며 멋쩍게 웃었다.

세밀화란 말 그대로 대상을 세밀하게 그리는 그림이다. 이런 정의만 놓고 보면 언뜻 떠오르는 의문은 '사진과는 뭐가 다를까' '사진이면 될 텐데 굳이 이렇게 힘들게 그릴 필요가 있을까'따위들. 하지만 흔히들 간과하는 게 사진은 대상의 한 부분만 초점을 맞춰서 대상 전체를 정밀하게 드러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의 시각도 마찬가지다. 초점이 맞는 부분만 선명히 볼 뿐, 나머지 부분은 흐릿하게 뭉개진다.

세밀화는 이를 보완해 바로 한 컷에 사물의 모든 특징과 형태를 남김없이 포착해 그리는 것이다. 한 장의 세밀화를 위해서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부분에 초점을 맞춘 사진이 여러 장, 때로 수십 장이 필요하다. "사진뿐만 아니라 우리 눈이 쉽게 놓치거나 간과한 부분까지 다 찾아내서 그림으로 설명해주는 거죠. 비슷비슷하게 생긴 들풀이나 약초의 경우는 사진만 봐서는 쉽게 구별하기 어려운 때가 많은데, 세밀화는 그 차이를 명확하게 드러내주는 겁니다." 몇 년 전 물고기 극세밀화를 그릴 때는 물고기를 직접 보면서 비늘 개수까지 다 계산해 그대로 재현했는데, 그 때가 공교롭게 여름철. 물고기가 흐물흐물해져 한 시간 작업한 뒤 냉장고에서 얼리고, 다시 잠깐 작업하고 얼리기를 반복하며 진땀을 뺐다고 한다.

세밀화 작업을 위해 사진을 여러 장 찍고, 세세하게 대상을 관찰하는 것 외에도 백과사전 찾기도 필수다. 희귀 동식물의 특징을 정확히 이해해야 실물을 봤을 때도 특징을 놓치지 않기 때문. 그래서 취재 및 스케치 기간이 채색 기간만큼이나 오래 걸린다고 한다.

세밀화에 깃든 따뜻함과 교감

이처럼 사물에 대한 극한의 탐색과 재현을 고려하면 세밀화가 무척 기계적인 작업으로도 여겨질 법한데, 색채 재현조차 컴퓨터의 도움을 거의 빌리지 않는 순수 수작업이다. 이씨 외에도 대부분의 세밀화 작가들이 수채 물감으로 직접 그린다. 세밀화의 주 대상이 바로 자연의 동식물들인 까닭에 그 느낌을 살리기 위해선 자연적인 색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컴퓨터 그래픽은 인위적으로 뽑아낸 색이어서 처음에 볼 때는 화려해 보이긴 하지만, 오래 보면 질리는 느낌도 있잖아요. 수채 물감이 그래도 자연적인 색감에 더 가깝기 때문에 수채 물감을 고집하는 겁니다." 유화나 아크릴 등의 재료를 쓰지 않고 수채물감만 사용하는 것도 수채 물감이 가는 선을 표현하는데 효과적이란 점 외에도 자연적 질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작업 과정엔 중노동이라 할만한 혹독함과 엄정함이 필요하지만, 그 밑바닥에는 자연과의 교감정신이 숨쉬고 있는 셈이다. 이는 세밀화 작가들의 작가 정신과도 맞닿아 있다. 이씨는 "그려야 할 대상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느낀다"고 말했다. 이를테면, 아무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 허드레 들풀들도 그네 나름대로 제 각각의 특징을 띠며 존재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는 통찰이다. "별꽃이 밭이나 길가에 지천으로 깔려 있는데, 예전에는 그 존재 자체를 몰랐다가 세밀화를 그리면서 뒤늦게 눈에 들어왔어요. 어떤 생물이든 다 존재하는 이유들이 있구나 싶어 경외심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독자들에게도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는 작은 부분의 아름다움을 알려드린다는 보람으로 일하는 거지요."

그가 요즘 작업중인 대상은 300여 년 전에 멸종한 도도새다. 인도양의 모리셔스 섬에서 서식했던 이 새는 평화로운 자연 환경으로 날개가 퇴화해 날지 못하게 된 새인데, 16세기 서구인들이 들어오면서 인간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서구인들의 침입 이후 불과 100여년만에 자취를 감췄다. 몸체 일부의 표본과 당시 도도새를 그린 스케치만 전하고 있는데, 이씨는 도도새에 대한 설명과 스케치를 참고해 작업하고 있다. 그는 "요즘도 사람들의 무관심과 이기심으로 하루에 50~100종 가량의 생물이 멸종하는 걸로 알고 있다"며 "도도새를 그리면서 그 멸종 과정을 떠올리니 마음이 아프면서 애착이 많이 간다"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면.

서울 토박이인 그가 이 곳으로 내려온 것은 첫 아이가 막 태어났던 2007년 무렵. 어머니가 요양차 지내다가 돌아가신 뒤 빈 곳으로 남은 집이었다. 세밀화를 그리기 위해서 어차피 식물 취재를 다녀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시골에 정착하기로 결정했는데, 서울에서 살림을 꾸리기 어려웠던 만만찮은 현실도 한몫 했다.

세밀화 한 컷을 그리는 데 많은 시간이 들다 보니, 당연히 생계를 넉넉히 꾸리기 어려운 면이 없지 않았다. 동화책이나 그림책 한 권의 그림을 그리는데 4~6달 가량 걸려 일년에 몇 권 밖에 작업 하지 못한다. 특히 출판시장이 해가 갈수록 어려워지다 보니 그림 한 장에 한 달씩 걸리는 극세밀화는 이제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출판사들이 한정된 비용으로 빨리 그림을 얻으려고 하니까, 작가들도 기한을 맞추기 위해선 밀도 있게 그리기가 어려워지고 있는 거죠. 예전의 장인 정신이 차츰 사라지고 있는 듯해서 아쉬움도 많아요."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미대생들도 출판 시장으로 쏟아져 들어오다 보니 그림 가격이 갈수록 떨어지는, 엎친 데 덮친 상황이다. 이는 곧 부실한 그림으로 드러나고 결국엔 독자의 외면을 받게 되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수 있다.

어려운 여건이지만, 한땀 한땀 그의 붓질은 지금껏 그래왔듯 계속될 것이다. 그는 "우리 아이들이 동식물의 아름다움, 특히 멸종 위기에 처한 생물들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깨닫도록 더 많은 대상을 찾아서 자료로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단양=글·사진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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