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을 보다 휙하니 고개를 돌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거울 속 제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아서입니다. 턱선은 뭉개진 지 오래고, 눈두덩은 왜 그리 만날 부어있는지요. 거울이 확인해주는 세월도, 항상 지친듯한 모습도 못내 받아들이기 싫었습니다. 문득 목소리에서도 기름때가 낀듯한 껄끄러움이 느껴졌습니다.
도대체 말간 기운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풋풋함도 생기도 찾기가 힘들었습니다. 몸과 마음에 켜켜이 쌓인 칙칙한 찌꺼기를 걷어내고 싶었습니다. 마침 남녘서 불어온 봄바람이 꽃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꽃강’ 섬진강과 ‘어머니산’인 지리산 자락에 꽃폭죽이 터지기 시작했답니다. 허허롭던 마음에 작은 생기의 불꽃이 피어났습니다. 부드러운 꽃잎과 꽃향으로 제 몸과 마음에 찐득찐득 달라붙은 기름때를 씻어낼 수도 있겠다 싶더군요. 가녀린 꽃 한 송이가 피워낼 무한한 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꽃잎을 나풀거리게 하는 강바람의 따뜻한 위안이 날카로운 제 마음을 눅여주겠죠. 첫 봄꽃에 대한 부푼 기대를 안고 서둘러 차를 달렸습니다.
보고 또 봐도 그래도 좋은 게 섬진강변의 꽃인가 봅니다. 항상 봐도 가슴 설레게 하는 연인과 같은 풍경입니다. 전주-순천을 잇는 고속도로가 뚫려 올해 섬진강 꽃구경 가는 길은 더 빨라졌습니다.
처음 도착한 곳은 전남 구례의 산동면. 전국에서 가장 큰 산수유 군락지입니다. 물길과 너른 반석이 인상적인 반곡마을에도, 정겨운 돌담이 예쁜 상위마을과 현촌마을에도 병아리보다 부드러운 노란 산수유꽃이 만발해 있습니다. 노란 구름이 내려앉은 동화 속 세상입니다. 소설가 김훈이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했던 그 풍경입니다. 봄빛보다 노란 산수유가 파스텔톤으로 산천과 마을을 물들이고 있습니다.
마침 지난 밤 지리산 자락엔 하얀 눈이 내렸습니다. 노란 꽃잎 너머 하얀 눈을 이고 있는 순백의 산덩이가 아침 햇살에 반짝입니다. 나뭇가지에도 분명 흰눈이 내렸을텐데요. 동 트자마자 찾아온 마을인데 꽃나무 위에선 눈 한 송이를 보지 못했습니다. 꽃샘추위를 호위하고 몰아쳐온 눈송이도 봄 기운에 질려서인지 꽃송이에서 멀찍이 떨어져서야 제 빛을 토해냅니다.
봄구름같은 노란 꽃속으로 봄을 찍으러 나선 사진작가들이 이리저리 바삐 뛰어다닙니다. 종종거리는 발걸음은 노란 병아리를 닮았습니다.
산수유는 봄엔 노란 꽃을 피우고 가을엔 보석같은 빨간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나무입니다. 최근 조경수로 인기가 높아진 뒤 나무를 사겠다는 이들이 산동면 마을로 몰려왔었다고 하네요. 마을을 지키는 이들은 힘 떨어진 노인들뿐이죠. 수십 년을 식구처럼 키운 나무인데 쉽게 팔려고 하겠습니까. 하지만 도회지 나간 생때같은 친자식들이 돈이 꼭 필요하다고 사정사정하며 손벌리는 데는 버틸 재간이 없습니다. 기운이 달려 더는 산수유 농사 짓기가 힘들다는 핑계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몇 집에서 나무를 팔았다고 합니다. ‘산수유 마을에서 산수유가 없어진다’는 기사가 신문에 크게 나간 뒤 마을은 한바탕 홍역을 치렀습니다. 이후 주민들간 산수유를 지키자는 자체 결의가 이뤄졌다고 합니다. 하마터면 산동의 산수유가 부잣집의 조경수로 다 뽑혀나갈 뻔했습니다. 정말 귀한 풍경이 사라질 뻔했습니다.
지리산 자락에서 나와 이번엔 산수유 꽃잎 떨어진 노란 봄물이 모여 흐르는 강가로 나갔습니다. 푸른 강물과 하얀 백사장이 어우러진 섬진강입니다. 물길은 이리 휘고 저리 감기어 흐릅니다. 강물은 자고로 이렇게 흘러야 한다고, 4대강을 비웃듯 자연스러운 강 흐름길 그대로 흘러갑니다. 따사로운 봄 햇살이 강물을 반짝이고, 백사장을 눈부시게 하더니 제 뺨에도 내려앉아 살갗을 두들깁니다. 톡, 톡, 톡...
강변엔 매화가 가득 피었습니다. 강 저편의 전남 광양의 다압 땅에도, 강 이편의 경남 하동의 평사리 흥룡리 일대에도 순백의 매화가 강바람에 나풀거립니다. 제대로 된 강줄기와 봄의 전령 매화가 어우러진 풍경 속에 파묻혀 있다 보니 ‘그냥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싶더군요. 매화 과수원 위로는 매화 다음에 꽃을 피울 벚나무가 길게 가지를 드리웠습니다. 물오른 가지엔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합니다. 조금만 지나면 강변길은 화사한 벚꽃 터널을 이룰 것입니다. 섬진강이 더욱 근사하고 화려한 꽃스카프를 두르게 되겠죠.
꽃의 유혹에 꼬여든 벌과 나비처럼, 한없이 부드러운 꽃잎처럼 들뜬 마음으로 꽃밭을 서성거립니다. 하얀 매화 꽃잎이 코끝과 입술을 간지럼 태웁니다.
작은 꽃잎을 들여다봅니다. 접사 사진을 찍듯, 무수히 많은 꽃들 중 단 한송이에만 눈의 초점을 맞춥니다. 한참을 들여다 본 그 꽃에서 님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비루하고 지친 삶에 생기를 불어줄 사랑이 떠오릅니다.
구례·하동·광양=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여행수첩/ 구례·하동·광양 꽃기행
지리산 만복대 아래 전남 구례군 산동면 일대가 전국 최대 산수유 마을이다. 상위, 현천, 원촌 마을 등 30여 부락이 산수유를 키우고 있다.
산동의 산수유마을 중 가장 유명한 곳은 맨 윗동네인 상위마을. 고샅의 이끼 두껍게 내려앉은 돌담과 어우러진 노란 산수유꽃이 매력적이다. 19번 국도 건너편 현천마을은 산수유가 가장 밀집해 피는 마을이다. 상위 마을 등에 관광객으로 넘쳐날 때도 이곳은 알음알음 사진작가만 찾아오는 한적한 마을이다.
매화는 광양시 다압면 섬진마을의 청매실 농원이 가장 유명하다. 그래서 항상 인파로 그득하다. 사람에 치이는 꽃구경이 싫다면 주변 다른 매화밭을 찾아보자. 매화 농사가 돈이 되는지 섬진강변 많은 산자락에 매화밭이 조성됐다. 광양의 또 다른 매화 집산지는 백운산자연휴양림 가는 길의 옥룡 일대와 곡성과 승주 사이의 월등 일대다.
섬진강 건너편인 하동 땅에도 매화가 아름답다. 하동읍 흥룡리 먹점마을을 추천한다. 강변의 아랫마을 흥룡마을에서 급경사를 타고 1.5km 가량 올라가면 먹점마을이다. 거대한 설치작품 같은 층층의 다랑논이 시선을 빼앗는다. 그 계단식 논두렁 밭두렁과 산비탈을 온통 하얗게 물들인 게 매화나무다. 30여 가구 대부분 매실 농사를 짓는, 하동서 가장 큰 매화마을이다.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산수유 → 벚꽃 → 배꽃 4월은 온통 꽃의 릴레이
섬진강은 봄의 더듬이다. 섬진강가에서 시작된 봄꽃으로 봄이 얼만큼 왔고, 지났는지를 알 수있다. 매화와 산수유로 시작한 '섬진강 꽃의 왈츠'는 봄이 다 갈 때까지 이어진다. 매화와 산수유꽃이 떨어져 땅을 수놓을 때면 벚꽃이 흐드러지기 시작해 더욱 화려한 꽃사태가 펼쳐지고, 이를 화사한 배꽃이 잇는다. 하동의 악양들판에선 무릎 높이로 자란 보리가 봄바람에 출렁이며 청청함을 자랑하고, 바로 옆 빈 들판에선 자운영이 곱게 물들며 햇볕에 따라 보라색의 화려한 스펙트럼을 연출할 것이다.
구례 산동면의 산수유가 절정을 보내고 나면 다른 지역의 산수유 마을이 그 노란 봄빛 축제를 이어간다. 산동의 산수유와 겨룰만한 아름다운 군락지로 경북 의성군 사곡면 화전리 일대, 봉화군 봉성면 동양리의 전통마을인 띠띠미마을, 경기 이천시 백사면의 백사마을, 전북 남원시 용궁마을 등을 꼽을 수 있다. 모두 산동의 산수유보다 한두 주 늦게 만개한다.
전국의 벚꽃길은 셀 수 없이 많다. 진해, 경주, 남해 등 전통적인 꽃길 외에도 새로 조성된 벚꽃길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최고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하동 쌍계사 가는 십리벚꽃길을 이야기한다. 꽃터널에서 흩날리는 분홍빛 꽃잎을 맞으며 걷다 보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구례에서 이어지는 섬진강변 백리 벚꽃길도 같은 시기 끝없이 긴 꽃물결을 선보이며 봄의 절정을 토해낸다. 강과 어우러진 섬진강 백리 벚꽃길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곳은 구례의 사성암이다. 강물보다 더 진한 꽃줄기가 길게 이어진 풍경을 가슴에 담을 수 있다.
섬진강과 가까운 순천시 월등면은 매화로 한 번, 복사꽃으로 또 한 번 봄의 축제가 열리는 곳이다. 희아산(763m)과 문유산(688m), 바랑산(619m) 등으로 사방이 둘러싸인 분지에 복사골이 숨어있다. 땅은 비옥하지만 농경지가 협소해 이곳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복숭아나무를 심어 소득원으로 삼았다고 한다.
무릉도원을 안내한다는 복숭아꽃이 또 아름다운 곳은 경북 영덕의 지품면 일대다. 청송군과 영덕군 사이의 황장재를 넘어 만나는 황장리, 지품리, 복곡리, 신안리 등 지품면 일대. 가파른 산비탈에도 물가의 평평한 밭에도 온통 복사꽃 천지다. 초록의 보리밭을 배경으로 피어난 분홍의 물결이 장관이다. 복사꽃 물결은 오십천을 따라 바다로 길게 이어진다.
매화 복사꽃 등 과일꽃의 아름다움은 배꽃, 사과꽃으로도 이어진다.
달 밝은 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할 만한 곳으로는 경기 안성을 추천한다. 높은 산보다는 평야와 완만한 구릉이 교차하는 안성의 들녘에 4월 중순 지나 봄이 깊어지면 소담스런 함박눈이 내려앉은 듯 배꽃이 만발한다. 공도읍 양기리 정봉마을 등에는 30만㎡의 배밭이 펼쳐진다. 배나무 아래 바닥에선 아지랑이꽃이 하얗게 색을 맞춰 더욱 로맨틱한 풍경을 자아낸다. 정봉마을 외에도 배꽃 언덕길이 멋진 방신리 새래마을과 대덕면 모산리와 소현리 일대도 배꽃 감상에 좋은 곳이다. 이들 세 지역 모두 인접해 있어 두어 시간이면 다 둘러볼 수 있다.
사과꽃은 잎이 먼저 난 후 꽃이 피기 때문에 매화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향내가 유난히 짙다. 경북 안동 청송 영주 의성 예천 문경 등에 널린 사과밭 일대에서 그 향을 맡을 수 있다. 영주의 경우 소백산 자락인 옥녀봉으로 들어가는 길과 풍기에서 희방사 가는 도로 주위가 온통 사과밭이다. 사과꽃 향을 맡으며 깊은 사색의 산책을 하고 싶다면 부석사 일주문 오르는 길을 추천한다. 문경의 사과꽃 감상 명소는 문경읍 팔영리, 평천리, 지곡리, 당포리, 산북면 내화리, 호계면 부곡리 등이 꼽힌다.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여수엑스포조직위 선정 식당
꽃구경도 식후경이다. 섬진강 꽃구경이 반가운 이유는 풍광도 좋지만 입이 즐거워지기 때문이다.
어떤 음식점을 찾을까 고민이라면 2012여수엑스포조직위에서 지정한 식당을 챙겨보자. 맛과 친절, 위생 등 조직위의 엄정한 심사를 거친 식당엔 'World Wxpo'라는 지정업소 간판이 달려있다. 여수를 비롯해 순천 광양 구례 보성 하동 등의 16개 시군의 숙박과 음식 쇼핑점이 선정됐다. 현재 1차로 선정된 업소는 393개소. 이중 섬진강 봄꽃 여행 코스에 들어가는 식당들을 소개한다.
구례는 지리산에서 나는 산나물을 이용한 한정식이 유명하다. 산채요리를 맛볼 수 있는 구례군 엑스포지정업소는 백화회관(061-782-0600), 예원(061-782-9917), 지리산식당(061-782-4054), 지리산회관(061-782-3124).
하동은 맑은 물에서 자라는 참게가 이름 높다. 참게탕을 맛볼 수 있는 하동의 엑스포지정업소는 동백식당(055-883-2439), 부흥재첩식당(055-884-3903), 하옹촌(055-883-8261), 청송회식당(055-883-2485), 금양가든(055-884-1580), 섬마을(055-882-3580), 혜성식당(055-883-2140), 부두횟집(055-883-8288) 등이다.
하동의 또 다른 자랑은 섬진강의 재첩. 청송회식당(055-883-2485), 혜성식당(055-883-2140), 부두횟집(055-883-8288), 금양가든(055-884-1580), 섬마을(055-882-3580), 하옹촌(055-883-8261), 부흥재첩식당(055-884-3903), 동백식당(055-883-2439) 등이 지정됐다.
광양의 맛하면 역시 불고기다. 광양불고기를 맛볼 수 있는 엑스포지정업소는 금정광양불고기(061-792-3000), 금목서회관(061-761-3300), 삼대광양불고기집(061-763-9250), 대호불고기(061-762-5678), 조선옥숯불갈비(061-792-8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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