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석 달 사이에 3명의 학생이 잇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한 달에 한명 꼴이다. 지난해 10월 서울대 역시 학생 4명이 제적이나 기타 이유로 자살했다고 한다. 어떻게 들어온 학교인데 자살을 할까?
필자는 오랫동안 모교의 학생생활연구소에서 대학생들을 상담한 경험이 있다. 그 학교 역시 입학이 쉬운 곳이 아니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속칭 인기학과 일수록, 혹은 소위 우등생 모범생일수록 자살 사고를 지닌 학생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살 사고를 지닌 학생 대부분은 학점으로 가시화된 피할 수 없는 경쟁 앞에서 좌절했고, 심한 열등감과 자괴감에 시달리고 있는 듯 보였다. 고등학교 때는 항상 전교 1등을 달리고, 집안의 기대주인 경우도 많았다. 어떤 학생은 인생의 길 끝에 스스로를 세워두고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이런 감정을 내색하지 않았다. 일부 학생들은 결국 휴학을 고려하기도 하는데, 휴학 역시 학업을 쉰다기보다는 학업에 실패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듯 했다. 이런 학생들일수록 실패 경험이 전무했다. 실패에 대한 면역력이 없었다.
한국의 대학생들, 특히 학업에 과중한 부담을 주는 대학의 학생들일수록 이른바 유예기가 없는 것 같이 보인다.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Erik Erikson)이 주장한 심리적 유예기(moratorium)는 정체성 혼란이나 진로 선택을 해야만 하는 20대들이 어떤 책임감도 없이 세상을 돌아다니고 시행착오를 하는 시기를 말한다. 그러나 조기 졸업의 영광, 30대 이전의 박사 학위 취득자, 벤처 기업의 신화가 가득한 대학 분위기에서 학생들은 감히 쉴 생각, 실패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이런 학생일수록 나는 나의 실패담을 이야기해 주었다. 대학원에 떨어져서 낙담했던 일. 수학 과목을 D를 받고 뒷동산에 올라가 눈이 벌개져서 울었던 일. 연애 실패담부터 실패란 실패는, 실수란 실수는 죄다 하고 죽겠다고 결심 했던 일도 이야기 했다. 어쩌면 이들은 너무 젊기에, 실패 없는 실패만을 했기에,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사소한 실패와 실수들이 언젠가는 자신들의 신화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대학은 학생들의 뇌에 무언가를 집어 넣고 뇌신경 회로를 더 많이 만드는 일뿐 아니라, 학생들의 정신과 영혼에도 관심을 좀 기울였으면 좋겠다. 역설적으로 대학들은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에만 관심을 쏟는다. 그러나 여기 지금 캠퍼스에 없는 학생들, 그들이야말로 지금 뭔가 심각한 어려움에 처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휴학하고 있는 학생들, 지금 어려움에 빠져서 휴학을 할까 고민하고 있는 학생들, ‘재수 없는 수재들’에게 둘러 쌓여 있는 ‘끌리는 바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 정말 괜찮아. 지독한 학벌 사회, 신 자유주의 경쟁만 남겨준 것 선배로서 미안해. 네가 오히려 학교를 버려야지. 죽긴 왜 죽어. 학교에서 배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도 남은 것, 그것이 교육이라고 아인슈타인이 말했잖아”
궁극적으로 진로 선택의 과정은 결국 자기 확신의 과정일 뿐이다. 그 길에서 살아만 남는다면 인생은 젊고 유능한 당신에게 기회를 줄 것이다. 그러니 살아 있으라. 그 무엇으로라도 살아 있으라. 인생은 길고, 학점은 짧다.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