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正義보다 情이 앞서… 대입제도 안 바뀌면 절대평가도 요원
"독일에서는 수능 같은 대학입학시험지를 각 학교 교사들이 채점해도 모두 결과를 신뢰해요. 우리도 그러자고 하면 누가 찬성할까요."(김창환 한국교육개발원 선임연구위원)
김 연구위원은 "우리사회에서는 교사, 교수가 쓴 추천서 한 장도 믿지 못하지 않냐"며 "정의가 아닌 정에 의해 움직이면서 경쟁은 지나치게 치열하다 보니 누가 봐도 객관적이지 않으면 서로를 믿으려 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창의 인성 교육을 위해 서술형 평가, 잠재력 평가 등을 확대하려는 욕구와 공정하게 입시를 관리해야 하는 책무 사이에서 한국 교육은 미궁에 빠져 있다. 선진국들은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을까.
줄 세우기 대신 학생 성장과정 기록
미국은 절대평가를 한다. 예를 들면 자국어인 영어는 문학작품을 읽고 본 논술점수와 수업참여도 연구과제 노트정리 등의 평가를 합산해 A부터 D까지 성적을 매긴다. 석차나 상대적인 등급은 쓰지 않고 학생의 발달사항 등을 세세히 기록한다.
각 대학은 학생 선발과정에서 SAT(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 외에도 학생부 서술형 기록 등을 필수적으로 활용한다. 남미자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대안연구소 연구원은 "스탠퍼드대에서 매년 SAT 만점자의 50%가 불합격하는데, 이때 고교 교사가 기록한 학습태도 등이 반영된다"며 "교사의 평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분석했다.
영국의 학교들 역시 학생의 학업성취도를 4단계로 평가하고, 학습태도, 지적 성장 상황을 기록한다. 다만 한국 고2에 해당하는 중등학교 11학년이 되면 우리의 내신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평가를 하는데, 과제물을 토대로 교사가 자율적으로 점수를 매기고 이에 대한 타당성 검사를 외부 평가기구가 한다. 특정 교사의 점수가 공정하지 못한 경우 재채점 명령이 내려오고 학교가 불이익을 받게 돼 평가의 신뢰도가 높다.
프랑스는 초등학교의 경우 각 학교 교사위원회 등에서 학생들을 평가하고 성적표에는 4점 혹은 5점 척도의 절대평가 결과와 학생의 능력에 대한 정보가 상세한 문장으로 기록된다. 중학교부터는 추가로 석차 없이 해당 학생의 시험점수와 학급평균 최고점 최하점을 기록해, 등수를 매기지 않고도 학생수준을 해석할 수 있는 정보를 준다. 대입 때는 수능에 해당하는 바칼로레아 시험을 따로 보며 이 시험의 내용은 고교 수업과 직결된다.
대학이 안 바뀌면 백약이 무효
우리나라에서도 평가개선 논의가 진행 중이다. 한국교육개발원은 지난달 6단계 절대평가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2014년부터 현행 9등급 상대평가 방식을 A부터 F까지 성적을 매기는 6단계의 절대평가 방식으로 바꾸자는 내용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연구 최종안이 나오면 공청회를 열어 의견 수렴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교육계에서는 "대입제도가 바뀌지 않으면 시도도 못한다"는 자조가 나온다. 남미자 연구원은 "가르친 교사가 학생의 장단점을 꼼꼼히 기록해주는 절대평가 방식이 이상적이지만 획일화된 교육과정과 엉성한 입학사정관제도 아래에선 고교등급제 부활 등 부작용이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1월 고교 교사 154명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절대평가 전환에 찬성 51%, 반대 48%로 의견이 팽팽하게 갈렸고, 반대 이유로는 '내신 부풀리기가 우려된다'는 응답이 45%로 가장 많았다. '대입에서 특목고가 유리해진다'는 의견도 18%로 2위를 차지했다.
김창환 연구위원은 "교사의 평가권을 보장하기 위한 방안을 고민해야 하고, 교사집단 스스로도 온정주의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우선은 대입이 변해야 하는 것이 평가 정상화의 선결조건"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서울대 등 일부 학교에서 입학사정관제 정착에 공을 들이고, 지역균형선발전형 도입 등의 노력을 시작했을 뿐, 대부분 대학은 어떤 연구나 재원투자도 없이 무늬만 입학사정관제를 하고 있다"며 "선발효과에만 집착하는 대학들의 근본적인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평가 개선을 위한 노력은 빛을 발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혜영 기자 shine@hk.co.kr
■ 박재원 소장의 진단
"16세까지 석차도 매기지 않고 우열반 수업도 하지 않는 핀란드 학생들이 초등학교부터 과도한 경쟁에 내몰리는 한국 학생과 비교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동등하거나 더 우수한 성적을 내는 것은 두 나라 사이에 '교육 평가'를 보는 시각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핀란드 공부혁명> 의 저자이자 핀란드식 자율 학습방법 전도사로 강연활동을 하고 있는 박재원 비상교육 공부연구소 소장은 '하고 싶을 때 공부하는 핀란드 아이들'과 '공부가 고역인 한국 아이들'의 차이점을 낳는 가장 큰 이유가 '시험'에 있다고 주장했다. 핀란드>
우리나라 교육평가는 '학생의 장단점을 파악해 교육에 반영하기 위한 피드백'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 채 '우열 판정'과 '정원 선발'이라는 비교육적인 목적에 매몰돼 있다는 것이다. 반면, 핀란드는 16세까지 학생간의 학력차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우수한 학생에게는 자율성을 더 부여하고 교사는 뒤쳐지는 학생에게 집중한다. 핀란드 아이들은 평가의 부담에서 벗어나 공부에 대한 흥미를 스스로 찾게 된다고 박 소장은 설명했다.
물론, 핀란드 학교에서도 시험을 치른다. 하지만 정해진 날짜에 일제고사식으로 시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수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또 점수뿐 아니라 수업태도나 열의 등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 평가하고 그 결과를 종합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개별 학생의 부족한 점과 잘하는 부분을 찾아 이후 교육에 반영하기 위한 것일 뿐 석차는 내지 않는다.
9학년을 마치는 16세가 돼서야 담임교사가 주요과목에 대해 4~10점의 평점을 매기고 그 평균점수로 진학할 상급학교가 정해진다. 만일 성적이 좋지 않으면 본인 희망에 따라 1년 더 무료교육을 받을 수도 있다. 교사의 재량권이 절대적인 이 평가방식에 대해 별 불만이 제기되지 않는다.
물론, 핀란드에서는 학교에서의 평가결과가 학생 장래에 미치는 파급력이 우리나라만큼 크지 않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교사의 평가가 학생을 장기간 다면적으로 평가한 점수라는 점을 상급학교는 물론, 학생과 학부모도 신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박 소장의 분석이다.
우리 교육이 핀란드 식으로 발전하기 위해서 박 소장은 "과도기적 혼란을 다소 감수하더라도 평가의 제일원칙을 '우열판정'을 위한 공정성 확보가 아니라 학생 개개인이 미리 설정된 목표를 얼마나 성취했는지 측정하는 절대평가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은, 과도기적으로 절대평가 결과를 미리 정한 표준분포 비율 내에 맞추는 다소 느슨한 상대평가를 통해 줄여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영오 기자 young5@hk.co.kr
■ 서울대 입학관리본부 김경범 교수 인터뷰
현 정부는 대학입시에서 입학사정관제를 확대하는 것이 공교육 정상화와 사교육 억제의 근본적 치유책이라고 판단해 그 비중을 계속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입학사정관의 전문성 부족과 자기소개서ㆍ학생부에 대한 신뢰성 결여 등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서울대의 입학사정관제 선발을 9년간 주도해온 입학관리본부 김경범 교수에게 입학사정관제에 대해 물었다.
-입학사정관제가 찾는 창의적이고 자기주도적 학생이란.
"창의적인 인재로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학생은 첫째, 현재의 학력이 뛰어나거나, 둘째, 새로운 영역에 대한 학습 능력을 갖추었거나, 셋째, 위험을 감수하고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학생이다. 입학사정관제는 현재 학력 외에 다른 두 가지 자질을 갖춘 학생을 찾아내려 한다."
-입학사정관제 전형은 '부모가 치르는 입시'라는 인식이 강하다. 즉, 수상경력이나 봉사시간 등 소위 스펙을 학부모가 일찍부터 챙겨줘야 유리하다는 생각이다.
"입학사정관제는 결과만이 아니라 동기와 과정을 같이 고려한다. 스펙이라는 결과물이 합격ㆍ불합격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의미다. 어떤 대회 수상이나 봉사 활동이 왜곡되어 진행된다는 것을 대학도 알고 있다."
-과거라면 불합격했을 학생이 입학사정관제를 통해 합격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는.
"몇 년 전 인문대학에 합격한 한 학생은 교과 성적이 타 지원자에 비해서는 매우 낮았으나 철학에 관심이 뚜렷했고, 이를 위해 스스로 다방면의 독서를 했다는 것을 입학사정관들이 확인했다. 또 면접 과정에서도 학생의 인문학적 소양과 학업능력이 입증돼 합격했다. 이 학생은 현재 대학에서 매우 우수한 학업 성취도를 보이고 있다."
-지원자가 제출한 서류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게 되는 정보는 무엇인가. 반대로 기재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 정보는 어떤 것인가.
"입학사정관들은 학생의 입장에서 학생의 고등학교 생활을 유추하려 노력한다. 따라서 어떤 꿈을 가지고 학교 생활을 했는지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또 '내가 무엇을 했다'는 정보보다는 '왜 하게 되었고 어떻게 준비하였나' 라는 정보가 중요하다. 학교 외부 경시대회 등에 지나치게 많이 참가하는 것은 동기와 과정설명이 부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부정적으로 비칠 수 있다. 학교 밖에서 평가 받기보다는 학교 내에서 어떻게 공부하였는지를 보여주는데 더 관심을 갖기 바란다."
-작성된 학생부에 대한 신뢰도 검증 장치가 있나. 예를 들어 누적 데이터베이스 활용이나 상습적 오기나 과대포장 학교 및 교사 리스트라든지.
"학생부 중 객관적 기록은 일부 교외활동을 제외하고 별도로 검증하지 않는다. 다만 학교 내 활동의 성과에 대해 축적된 과거 자료와 비교하여 확인하기도 한다. 매년 같은 문구가 발견되거나 학생이 읽지 않은 책을 교사가 임의로 기록하는 경우 등의 사례들이 대표적 예다. 현재까지는 고등학교와 교사에게 공식적으로 통보하고 있지는 않지만, 조만간 대학이 고등학교에 개선을 위한 협조를 요청할 수도 있다. 입학사정관제는 아직 도입 초기여서 문제점이 적지 않지만 교육정상화와 창의적 인재를 선발하는 획기적 제도인 만큼 학교, 학생과 학부모들이 함께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
정영오 기자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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