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의 독립영화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를 떠들썩하게 했다. 한국 영화인들 사이에서 "'무산일기' 봤냐"는 질문이 수시로 오갔다. 탈북자라는 인화성 강한 소재도 소재지만 "만듦새가 신인답지 않다"는 호평이 뒤따랐다. 열풍은 지난해 12월 서울독립영화제로 이어졌다. '똥파리'의 양익준 감독처럼 또 한 명의 독립영화 스타가 탄생했다는 말이 떠돌았다. 지난 2월 '무산일기'가 제40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 대상인 타이거상을 받으며 예측은 현실이 됐다. 로테르담영화제는 세계 최대 독립영화 잔치다. 홍상수 감독('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박찬옥 감독('질투는 나의 힘'), 양익준 감독('똥파리')이 타이거상을 수상했다.
올해 최고 독립영화로 꼽히는 '무산일기'의 박정범(35) 감독을 25일 오후 서울 가회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연출과 주연, 각본, 제작 1인 4역을 해낸 그는 "영화는 스티븐 스필버그만 만드는 것으로 알았던" 체육교사 지망생 출신. "군복무 시절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하나비'를 보고 영화공부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무산일기'는 그의 장편 데뷔작이다.
'무산일기'는 박 감독이 연세대 체육교육학과 재학 때 만난 탈북자 친구 전승철씨에 대한 실화 같은 영화다. 전씨는 남한에 먼저 정착한 형을 찾아 2002년 어머니와 함께 사선을 넘어왔다. 박 감독은 학과 동료인 전씨와 영화를 매개로 우정을 쌓았고, "알코올중독이 되거나 자살할 수밖에 없는" 탈북자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2008년 만든 '125 전승철'이 '무산일기'의 전주곡이었다. 미쟝센단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은 20분짜리 이 단편이 완성된 이틀 뒤 영화의 모델이 됐던 전씨는 위암으로 서른 살 인생을 마감했다. "완성본을 병원에 가져갔지만 이미 정신을 놓아 볼 수 없는 상태"였다고 박 감독은 회고했다. 영화 제목의 125는 탈북자들 주민등록번호에 일괄적으로 붙는 식별번호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삶을 상징한다.
'무산일기'는 "죽은 친구에 대한 의리와 사명감 때문에" 만들었다. 한달 반 동안의 촬영 과정은 지난했다. 제작비 7,200만원 중 단편영화제 수상 상금과 장학금 등으로 충당한 돈을 제외하고 4,800만원이 빚이었다. 알고 지내던 탈북자들은 "다들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어두운 부분을 드러낸다"며 등을 돌렸다. "촬영기간이 짧아 후반엔 모두가 좀비가 되어 현장을 지킬"정도로 고단하기만 했다. 아버지 박영덕씨가 탈북자를 돕는 박 형사로 출연, 힘을 보탰다. '시' 연출부로 일하며 알게 된 이창동 감독의 독려도 큰 힘이 됐다.
그가 주인공 전승철을 연기한 사연은 가슴을 누른다. "당초 단편부터 승철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만들려고 했으나 위암 말기라 불가능했다. 그 친구의 눈빛과 말투, 심정을 내가 가장 잘 아니까 자연스레 주연을 맡았다"고 말했다. 그는 불량배에게 얻어맞는 장면 등을 찍다 미세골절을 당하기도 했다.
"마흔 살 되어도 장편을 못 찍을지 모른다"는 패배감에 젖어 살았던 박 감독은 "(여러 영화제가) 내 진심을 알아준 듯해 고맙다"고 말했다. "승철이가 봤을 때 절대 부끄럽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찍었다. 마지막 장면 찍을 땐 쓸쓸하게 죽어간 승철이가 떠올랐다. 탈북자들에겐 북의 가족에 돈 몇 푼 보내고 안정적인 직장 생활 하는 게 꿈이다. 별거 아닌 듯하지만 한국 오면 가게 간판조차 이해 못하는 사람들에겐 버겁기만 하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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