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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사흘간의 동행] <12> 뮤지컬 '그리스' 여주인공 데뷔 앞둔 손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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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사흘간의 동행] <12> 뮤지컬 '그리스' 여주인공 데뷔 앞둔 손예슬

입력
2011.03.28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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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떨린다… 그러나 열정이 있다… 나는 이미 프로다

“이게 미쳤나!” 리조가 샌디의 뺨을 후려 갈긴다. 얼굴이 완전히 돌아간다. 화끈한 충격이다. 샌디는 곧 뒤로 물러서 눈물을 글썽거리며 고개를 돌린다. 대니가 “샌디! 괜찮아”라고 묻는다. 샌디는 대니에게 “네 친구들한테 지금 사실대로 말해. 나에 대해 했던 말들 모두 거짓이라고 빨리 말해. 비겁해. 네가 한 그 거짓말 때문에 내가 얼마나 힘든 줄 알아?”라고 울먹인다.

샌디는 눈물을 글썽이며 대사를 했지만 곧 감독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맞았으면 너한테 동정심이 가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아. 돌아서서 대니에게 대사할 때까지 감정 연기가 아무것도 없잖아. 다시 해 봐.”

샌디는 몇 번이고 뺨 맞는 연기를 계속했고 뺨은 점점 붉어졌다. 다행히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 표현은 점점 매끄러워졌다. 처음에는 당황한 듯 눈빛이 흔들리던 샌디는 이내 눈동자에 힘을 주어 대니를 돌아봤다.

다음 달 8일부터 두 달여간 재상연되는 뮤지컬 ‘그리스’에서 여주인공을 맡은 신인 손예슬(21ㆍ샌디 역)이 29일 서울 남산창작센터에서 뮤지컬 전문배우인 김응주(23ㆍ대니 역) 박은미(23ㆍ리조 역)와 함께 했던 연습 장면 중 한 토막이다. 뮤지컬 무대에 서는 것이 난생 처음인 손예슬은 아마추어의 때를 벗고 프로가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환골탈태다.

1972년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처음 만들어진 뮤지컬 ‘그리스’는 10대의 사랑과 우정을 그린 하이틴 드라마다. 고교 불량 서클 티버드(T_bird)파의 리더 대니가 여학생 서클 핑크레이디(Pink_lady)파의 질시를 넘어 여주인공 샌디와 사랑하게 되는 풋풋한 이야기가 매력적이다. ‘썸머 나잇(Summer Night)’등의 노래도 압권이다.

한국에서도 윤공주 조여정 유나영 등 셀 수 없는 스타 배우의 등용문이 돼 왔다. 2003년 국내 초연 이후 1,700회를 이어 온 작품의 바통을 이어받는 배우들의 중압감도 그만큼 크다. 더구나 이들 중 상당수는 신출내기다.

29일 서울 남산창작센터 3연습실은 배우들의 땀과 열기로 후끈 달아올라 있었다. 배우들은 오전부터 실제 공연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연습하는 런스루(run_through)를 했다.

잠깐 쉬고 바로 오후 장면별 연습이 이어졌다. “샌디, 우리 나이에는 이성 친구를 사귀는 데 신중해야 할 것 같아. 우리 아빠 이사장인 거 알지. 샌디, 가자.” 학교에 새로 전학 온 샌디를 꼬시려는 유진(신상민 분ㆍ29)에게 샌디는 고개를 돌린다. 제비 냄새 풀풀 나는 매끈한 연기다. 그런데 여기서 정태영 감독의 지적. 대상은 신상민이 아니고 손예슬이다. “아니지. 거기서 돌아보지 말고 얘기한 애를 끝까지 보라고.” 관객이 있는 무대에 한 번도 서 본적이 없는 것이 이런 데서 티가 팍팍 난다.

“여주인공이요? 무대에 서 본 적도 없어요.”

장면별 연습이 끝난 후 오후 4시40분께 정 감독의 노트(지시)도 주로 손예슬의 동작과 표정 연기에 대한 주문이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요구는 거의 개인레슨 수준이다. 모든 배우가 모인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지적받는 새내기의 입장은 난감 그 자체.

아직 앳되고 수줍어 보이는 그는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오게 됐을까. 손예슬은 뮤지컬학과 1년생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관객이 있는 무대에 올라간 적이 없다. 인문계 고교를 나와 뮤지컬학과에 들어갔지만 1학년은 스태프 역할밖에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영업을 하는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는 물론, 친ㆍ인척 가운데도 예능계 종사자나 전공자가 없다.

“처음 본 오디션이었는데 당연히 부들부들 떨렸죠. 프로필 사진도 없어서 집안 거실에서 블라우스를 입고 찍어서 30분 만에 급하게 냈어요. 그런데 100대 1의 경쟁(998명 가운데 10명)을 뚫고 합격한 데다 그것도 여주인공 역이니 저 자신도 황당하죠.”

기쁨은 잠시. 막상 연습을 시작해 선배들과 호흡을 맞추려니 실력이 달리는 것은 당연지사. 그러다 보니 자는 시간 빼고는 늘 연습이다. 아침 잠이 많은 편이지만 요즘은 아침 7시께 일어나 발성 연습을 하고 10시께까지 연습실에 도착한다. 점심시간에도 혼자 벽을 보며 연습한다. 저녁에 연습이 끝나면 남산에서 서대문구 집까지 1시간 정도를 일부러 걸어가면서 대사를 연습하고 머릿속으로 노래와 춤을 그려 본다. 춤 동작을 연습하며 걷는 그를 보고 수군대는 사람도 있었다. 노래는 연출자와 음악감독이 “한 색깔의 정직한 목소리”라고 격찬할 정도로 그가 자랑하는 부분이지만 뮤지컬 무대를 위해 다듬는 일은 또 다른 얘기다.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다.

연습 첫날부터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아 통통하다”는 말을 들은 그는 마트에 들러 계란과 닭가슴살을 샀다. 속칭 ‘덴마크 다이어트’를 시작한 것이다. 손예슬은 이 식이요법으로 두 달 만에 6㎏이나 살을 뺐다.

“프로가 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책임감이 커지고, 자연스러워지고, 무대 위에서 즐길 줄 알아야 하니까요. 스스로 즐겨야 자연스러워질 수 있다는 생각을 현실로 만들려고 기본기부터 다지고 있어요.”

정 감독의 지시로 그는 하루에 1시간씩 웃는 연습도 하고 있다. 자연스러움이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지는 것은 아니니까.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하루 전인 28일 연습장. 2, 3명의 신인 연기자들부터 나와서 선배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앉아있었다. 이들은 자기 분량의 노래를 연습하다 김응주를 비롯한 선배 연기자들이 들어와 몸을 풀기 시작하자 일제히 일어나 두 손을 모으더니 90도로 숙이며 “안녕하세요”를 연발했다.

정 감독이 들어오고 곧 장면별 연습이 시작됐다. 첫 연습 장면은 2막의 시작 부분, 댄스파티가 끝나고 티버드파가 다른 학교 서클과 결투를 준비하는 것이다. 쇠사슬을 둘러매고 들어와 놈들을 혼내 주자는 하강웅(31ㆍ두디 역)의 능청 연기에 신예 이수용(26ㆍ소니 역)이 권투 동작을 하며 대답할 차례다. “내가 말이야….”

여지없이 정 감독은 연기를 중단시키고 매섭게 이수용을 나무란다. “다른 애들이 쌓아 놓은 에너지가 너한테만 오면 푹 꺼져. 만들어 놓으면 푹 꺼진다고. 대사를 바로 받아서 해야지. 소리도 훨씬 커야 하고.”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수용을 2007년 소니 역으로 데뷔해 그의 멘토 역할을 하고 있는 선배 이창희(31ㆍ케니키 역)가 무대 한 켠으로 데려가 호흡을 맞춰 본다. 명지전문대 연극영상학과 학생인지만 군대를 다녀온 뒤 진학해 또래보다 나이가 많은 이수용도 이번이 데뷔다. 아마추어의 껍질을 깨고 프로의 무대를 준비하는 그에게 중압감은 더욱 크다. 그래서인지 성격과는 달리 무대 위에서는 “기어들어 간다”는 질책을 많이 듣는다.

그의 역할 소니는 허풍쟁이로 우쭐대는 애송이 역할이다. 정 감독은 “재미있고 활달한 배역인데다 장면이 장면이니만큼 대사의 타이밍과 거침없는 몸동작이 받쳐 줘야 분위기를 살릴 수 있다”고 강조했다.

쉬는 시간에 이수용은 다시 털털한 청년으로 돌아와 있었다. “원래 몸치인 데다 춤 연기는 이번이 처음이에요. 너무 많이 혼나서 부족하구나라는 걸 많이 느껴요.” 그는 ‘가장 힘들 때가 어떤 때냐’고 묻자 “머리로는 아는 데 몸이 안 움직일 때죠. 정말 답답해서 괴성을 지르고 싶을 때도 있어요. 창희 형이 늘 하는 말이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인데, 아직 저는 머리도 가슴도 뜨거운 상태인 가 봐요. 무대에 오르기 전까지 어떻게든 만들어 가야죠. ”

기다림과 조화

이들과 사흘째인 30일. 개막이 바싹 다가오자 연습실에는 각 배역에 맞게 머리를 만지고 온 배우들이 나타났다. 생전 처음 해 보는 금발을 한 여자 배우, 퍼머를 한 남자 배우는 서로의 모습을 쳐다보더니 낄낄대며 웃는다.

이날은 안무가가 전체 극을 런스루(run_through)로 진행하며 동선과 동작을 일일이 챙겼다. 런스루를 하다 보니 단역들은 연습 무대에 서는 시간보다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초롱초롱 맑은 눈에 약간 겁먹은 듯 경직된 단역들이 앉아 있는 곳으로 갔다. 이들도 ‘그리스’재상연을 위해 OD뮤지컬컴퍼니와 DSP가 1월부터 3회에 걸쳐 ‘뮤지컬 아이돌 프로젝트’를 통해 손예슬과 함께 뽑은 재원들이다. 이민경(23) 강윤정(21) 유연(29) 류승찬(27) 박종호(25) 이재균(22) 김용한(21)은 주로 주역들의 동료 학생 역할을 하며 합창과 군무로 극 전체의 분위기를 이끈다.

이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 기다림이다. 첫 무대부터 주연으로 발탁된 손예슬과 이수용이 장면별 연습을 할 때 벽 가에 나란히 앉아 있던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호호호. 빨리 연습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죠. 하지만 기다림도 한 과정이고 연습 장면을 가까이서 보는 것도 신기하고 공부가 돼요. 머릿속으로 어떤 역할을 하면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기도 하고 따라 해 보거든요. 또 작은 역도 주연처럼 열심히 하는 게 프로라고 생각해요.” 데뷔를 앞둔 이민경의 대답이다.

대학 영문학과에 다니다 군대를 제대한 뒤 서울예대 연기과에 진학한 박종호 역시 정식 무대는 처음. 그는 앙상블의 안무 연습을 가장 힘들어했다. “몸이 둔해 많이 혼났어요. ‘춤을 더 배우고 왔으면 잘할 수 있었을 텐데’하고 후회하기도 했죠. 오디션 보고 난 이후 춤 연습 하느라 몸이 여기저기 성한 데가 없어요. 그만큼 힘들었지만 춤출 때는 자신을 확인하는 것 같아 은근히 흥분도 돼요.”

기다림과 조화. 프로가 되는 가장 빠른 법칙을 배운 것은 어쩌면 이들일지도 모른다.

김청환 기자chk@hk.co.kr

■ 뮤지컬 배우는 어떻게 되나

"아이돌 출신이 어떻게 뮤지컬을 소화해?" 아이돌 그룹 '핑클'의 멤버였던 옥주현이 2005년 뮤지컬 '아이다'에 전격 발탁됐을 때 뮤지컬 관계자들이 한결같이 한 말이다.

하지만 옥주현은 모든 활동을 접은 뒤 연습에 전념했다. 그는 당시 핑클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기존 배우들과 똑같이 오디션을 치렀다. 기획제작사가 편의를 봐 준 것은 오디션의 마지막 순서로 노래를 부르게 해 타 지원자들의 시선을 덜어 준 것 정도.

이 작품으로 인정받은 그는 이후 '시카고' '캣츠' '몬테크리스토' 등의 작품에 출연했고, 현재 국내 뮤지컬 계를 대표하는 여배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뮤지컬 배우가 되는 유일한 길은 오디션이다. 제작사가 수시로 공고하는 오디션에 참여한 지망생은 보통 자유곡과 지정곡을 부르는 가창 오디션과 연기 워크세션, 연기 오디션 등의 단계를 거쳐 선발된다.

라이선스 공연의 오디션을 진행하는 외국 스태프에 의해 신데렐라가 탄생하기도 한다. 무명 배우였던 김보경은 2006년 뮤지컬'미스 사이공'에서 그의 잠재성을 알아본 외국 스태프에 의해 주인공 킴 역으로 뽑혔다. '아이다'에서 노래 한 소절을 부르는 네예브카 역할을 했던 무명의 앙상블 배우가 모든 여배우가 꿈꾸던 킴 역할에 뽑히자 화제가 됐었다. 2004년 '맘마미아' 초연 당시 외국 스태프들이 주인공 도나 역에 박해미를 전격 발탁한 것도 낙점이 아닌 오디션에 의한 것이다.

이선균 오만석 엄기준 홍지민 김우형 조정석 등 뮤지컬 전문배우들도 오디션을 통해 첫 무대에 섰다. 강지환 김무열 김주원 지현우 등은 뮤지컬 오디션에서 기회를 얻어 연예계에도 들어섰다. 요즘은 유명 배우들도 비공개 오디션을 거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추세다.

김청환 기자 ch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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