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빛나는 학생부? 선생님이 SKY 갈 애들에게만 주는 선물이죠"
"중하위권이 돋보이는 학생부 갖기는 쉽지 않죠. 학교에선 주로 1등급 학생을 밀어주니까요."
서울 소재 공립 A고 3학년 K(18)군은 지난 학기 황당한 일을 겪었다. 4,5명 학생이 조를 이뤄 함께 글을 써 내는 국어과 수행평가에서 조원 전원이 같은 결과물을 제출했는데도 점수가 다르게 나온 것. 평소 1등급 학생은 점수가 높게, 낮은 등급 학생은 낮게 매겨졌다. K군은 교사에게 '내용이 같으니 점수도 같아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지만 '기여도 등 개인평가 항목이 있다'는 답을 들었다. 교사의 기준을 납득할 수 없었던 K군이 다시 기준을 물었지만 이번엔 'SKY(서울ㆍ고려ㆍ연세대) 지원할 거 아니면 도를 넘지 말아라', '공부도 못하는 게 왜 아는 척을 하느냐'는 답이 돌아왔다.
중ㆍ고교 학사관리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의 신뢰는 매우 낮다. 절대평가 등을 적극 도입하는 대다수 선진국들과 달리 국내 중ㆍ고교에서는 상대평가, 내신등급제 등을 기반으로 학생 성적을 평가한다. 이유는 공정성 확보, 공정한 입시를 위해서다. 하지만 공정성 확보와 창의인성 교육 정책이 뒤엉킨 학교 현장에서 일부 학교들은 '1,2등급 잘 키워 명문대 보내자'며 평가 결과를 왜곡하기도 하고, 심지어 부정을 저질러 학생과 학부모를 좌절시키고 있다.
또 다른 공립고 B군(18)은 "교내 경시대회 생활우수상 학업우수상 표창 등은 원래 명문대 진학생 퍼주기용"이라며 "학생부에 수상경력 한 줄 채우기 위해 목숨 거는 학생들이 많은데, 학교에서 한정된 교내상은 대체로 학업 우수생들에게 몰리는 것을 선생님과 애들이 당연시한다"고 했다. 그는 "애초에 기준을 세워 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중간ㆍ기말고사 성적이 우수한 학생에게 순서대로 뿌리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경기 소재 특목고인 C고 2학년 E(18)양은 3학년 진학을 앞둔 지난해 자퇴했다. 명문으로 알려진 학교라 기대를 안고 입학했지만 늘 '저평가되고 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E양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좋은 점수와 상을 가져가고 벌점을 피해가는 학생은 정해져 있었다"며 "오죽하면 학생들끼리도 '서울대 못쓰는 주제에 말 시키지마'라는 폭언을 할 정도"라고 했다. E양은 결국 '이럴 바엔 내신 없이 혼자 공부하겠다'는 생각으로 학교를 떠났다.
일부 고교들이 이런 '꼼수'를 부리는 것은 도덕불감증과 대학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된다. 서울 소재 사립 E고 국어과 교사 H(27)씨는 "입학사정관제 등의 평가기준이 모호해 명문대 지원 학생의 학생부는 완벽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다"며 "대입 성적이 좋아야 좋은 신입생이 들어오고 또 그래야 암암리에 진행되는 대학의 고교등급제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이 퍼져있다"고 했다.
범죄 수준의 내신 조작도 끊이지 않아 이를 경험한 이들의 좌절감은 거의 회복불가능이다. 최근 교감이 한 기업인 자식에게 시험지를 유출해 이 학생 석차가 전교 60등에서 1등으로 올랐다는 의혹이 제기돼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서울 D고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학교의 한 학부모는 "의혹을 낱낱이 적은 익명의 투서가 아니었으면 아무도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라며 "학교는 지금까지도 피해를 본 다른 학생들에 대한 구제방법은 말하지 않고, '채점 오류일 뿐'이라고 거짓해명만 반복하고 있다"고 개탄했다.
서울 B고에서는 교장과 교사가 입학사정관 전형 지원을 앞두고 학생부를 조작하고, 서울 Y고 영어 교사는 자신의 딸에게 기말고사 시험지를 유출했다는 의혹으로 경찰 수사를 받는 등 올 들어서만 서울에서 성적 조작으로 파문을 일으킨 사건이 벌써 3건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학들은 고교 학생부를 믿지 못해 대입 반영 비율을 경쟁적으로 줄이고 있다. 2010학년도 입학 전형에서 고려대와 연세대는 수능점수만 보는 '우선선발 전형'을 50%에서 70%로 늘렸고, 서울대는 2012학년도 입시에서도 내신을 축소해 수시모집 지역균형선발전형에서 1차 내신 전형을 없앴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사교육비 절감과 공교육 정상화'라는 명분으로 학생부 위주의 평가 확대를 호소하고 있지만 현실은 거꾸로다.
한국교육개발원 김창환 선임연구위원은 "교원들이 철저한 직업의식을 가지고 학생을 엄정하게 평가하고 학생이 그 결과에 신뢰를 보내는 여타 선진국과 달리, 우리는 평가에 온정주의가 지나치게 개입되고 있다"며 "성적 관련 비리를 범죄 차원에서 엄단하고 평가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혜영 기자 shine@hk.co.kr
■ 허위 학생부 부추기는 입학사정관제
현 정부의 대입 핵심 정책인 입학사정관 전형은 성적 위주의 선발 대신, 학생의 창의력과 잠재력을 평가한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하지만 주관적인 평가라는 본질 때문에 각종 비리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교과 성적의 조작은 중대한 범죄로 인식돼 처벌되는 반면, 비교과 영역의 각종 활동을 허위 기재하거나 조작하는 것은 '학생을 위한 선의'로 여겨진다. 학교에 도덕 불감증이 만연해 있는 것이다.
순천향대가 지난해 입시에서 입학사정관 전형에 제출된 교사추천서를 검색한 결과 1,342건 가운데 7.2%인 97건이 표절로 드러났다. 특히, 표절 판정을 받은 교사추천서의 87%는 동일한 교사가 작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교사가 개별 학생의 특성과 장단점을 고려해 쓴 것이 아니라 여러 학생에게 똑 같거나 비슷한 내용의 추천서를 만들어줬다는 얘기다.
입학사정관 전형의 선발 기준이 모호한 점, 이로 인해 학부모들이 기본적으로 대학들을 신뢰하지 않는 점이 입시 과열을 낳고, 부정으로 이어진다는 지적이다. 서울의 한 사립대 입학사정관 A씨는 "입학사정관 전형의 선발 기준은 대학 입장에서는 '영업 비밀'이라 엄밀히 따지면 공개할 수 없다. 다만 특별히 중시되는 선발 요소와 반영되지 않는 불필요한 서류에 대해 설명을 해도 학부모들이 믿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한 입시관계자는 "자녀보다 학업 성적이 낮은 학생이 입학사정관 전형으로 합격하면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스펙'이 부족했기 때문이라 생각해 대학에서 요구하지도 않는 각종 스펙을 쌓으려고 하고, 심지어 조작까지 하게 된다"고 말했다.
일부 대학은 입학사정관 전형 지침을 어겨 스스로 불신을 자초하기도 한다. 카이스트, 광주과기원, 가톨릭대는 지난해 사교육 유발 요인으로 지목돼 반영하지 못하도록 한 토익, 토플 등의 공인외국어시험 성적을 제출하도록 한 것이 적발돼 정부가 지원 예산을 회수하기도 했다.
입학사정관 인력이 태부족한 것도 불신의 원인이다. 지난해 국정감사 때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입학사정관 1명이 심사해야 하는 학생 수는 대학별로 수백명에서 많게는 1,000명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대로 된 사정이 이뤄질 수 없는 구조인 셈이다.
한준규 기자 manbok@hk.co.kr
■ 대학들도 학생 평가 '부풀리기'
서울 H대 사범대 J(27)씨는 지난해 교직이수 과목 성적을 확인한 뒤 복잡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한 학기에 4번 결석했고 과제보고서는 급조했던 수업에서 A학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기말고사에서 아예 답을 적지 못한 문제도 많았다. J씨는 "일단 학점을 잘 받았으니 솔직히 큰 불만은 없다"면서도 "힘들게 공부해도 A를 받을까 말까 한 다른 수업을 생각하면 공정하지 않다는 느낌은 든다"고 말했다. 그는 "교직이수 등의 과목은 A~F학점 비율이 교수 재량에 달려있는데, 승진 재임용 연임심사를 앞둔 교수와 강사 중에는 학생들의 강의평가를 의식해 선심성 학점을 뿌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대학의 학사관리도 학생들의 불신을 초래하고 있다. 실제 교육과학기술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이 대학알리미(www.academyinfo.go.kr)를 통해 전국 190개 4년제 일반대학 2009학년도 졸업생 평점을 분석한 결과 A학점 35.5%, B학점 55.5%로 졸업생의 91%가 B학점 이상의 성적을 받았다.
학점 부풀리기가 이처럼 심각하자 일부 대학들은 한 강의에서 교수가 학생에게 줄 수 있는 A, B학점의 비율을 제한하고 있다. 서울대, 숭실대 등은 A,B 학점을 60%내에서만 허용한다. 하지만 이 같은 조치를 취한 대학이 일부인 데다, 몇몇 특수과목, 수강생이 적은 과목 등에서는 비율제한이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수 있어 적용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대학에서 학생 성적은 여러 평가 잣대 중 가장 푸대접 받는 자료로 전락했다. 취업포털 알바천국이 이달 파인드잡과 500인 미만 사업장 인사담당자 312명에게 '(취업에서) 예전보다 가장 변별력이 없어진 기준은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가장 많은 30%(94명)가 학점을 꼽았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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