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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리치 스토리] 독일 자동차 가문, 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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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 리치 스토리] 독일 자동차 가문, 콴트

입력
2011.03.25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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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산 직전 BMW 인수, 글로벌 명품카로 질주

항공기엔진 제조회사로 출발한 95년 역사의 BMW가 생사의 중대한 갈림길에 선 적이 있었다. 1959년 심각한 재정난으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서 다임러벤츠에 매각을 눈앞에 둔 상황. 이때 BMW에 구원투수로 등장한 이가 헤르베르트 콴트(1910~1982년)였다. 콴트 일가는 지난 50여년간 BMW 대주주 위치를 지키며 파산의 벼랑 끝에서 세계 최고의 자동차기업으로 성장시켰다.

BMW 구원투수 콴트家

59년 당시 BMW는 경영진도 포기한 회사였다. 헤르베르트 콴트는 집안에서 다임러벤츠와 BMW, 양사의 지분을 모두 보유하고 있었는데 원래는 BMW 매각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그러나 '바이에른의 자존심' BMW를 잃을 수 없다며 매각에 반대하는 소액주주와 근로자들의 노력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재를 털어 BMW 지분을 50%까지 늘려 경영권을 확보함으로써 독자생존을 선택한 것. 전 재산을 건 도박이었다.

헤르베르트는 20세기 이후 독일 경제계의 최대 명문가로 꼽히는 콴트 가문의 2세대 사업가. 그의 아버지 귄터 콴트(1881~1954년)는 1ㆍ2차 세계대전 때 군수품을 납품해 큰 돈을 벌었고, 1930년대 말에 배터리업체 AFA를 비롯해 많은 회사를 인수하면서 몸집을 키웠다. 유산으로 아들들에게 물려준 사업체만 약 200개에 달했다.

헤르베르트는 어렸을 때 망막질환을 앓아 시력을 거의 잃어버린 까닭에 교육도 집에서 받아야 했다. 하지만 콴트 가문의 국내외 사업체에서 현장교육(OJT) 형식으로 경영수업을 받을 수 있었고, 사업가로서의 수완도 뛰어났다. 32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배터리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했을 때는 75달러를 주고 산 시보레쿠페를 6개월 뒤 110달러에 처분하고 귀국했을 정도.

그의 도박은 성공이었다. 파산 위기에 몰렸던 BMW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 세계적 기업이 돼 있다. 성공비결은 독특한 가족경영철학. 오너임에도 불구하고 회사 경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는 콴트 가문의 경영방식은 '탈중심화한 조직'을 중시하는 헤르베르트의 경영철학에 뿌리를 둔다. 의사결정에 있어서 전문경영진에 최대한 힘을 실어주는 스타일이다.

그의 경영철학이 빛을 발한 건 70~93년 BMW 최고경영자(CEO)를 지내며 성장가도로 이끈 에버하르트 폰 퀸하임 덕분이기도 하다. 유능한 전문경영인을 가리는 선구안 또한 헤르베르트 콴트의 성공비결인 셈. 퀸하임이 CEO로 있는 동안 BMW는 매출이 무려 18배 늘었다. BMW의 주력제품 3ㆍ5ㆍ7시리즈는 헤르베르트의 오너십과 퀸하임의 경영능력이 시너지를 발하던 70년대에 탄생했다.

콴트 3세대

헤르베르트 사후 BMW의 경영권은 미망인 요한나 콴트(85)와 두 자녀 주자네 클라텐(48), 슈테판 콴트(44)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다. 이들은 BMW 지분을 각각 16.7%, 12.6%, 17.4%씩, 모두 46.7% 상속했고, 그대로 30년째 지키고 있다. 3명 모두 미 포브스지가 선정하는 세계 100대 부호에도 포함되기도 했다.

이중 가장 부자는 주자네 클라텐. 포브스 추산 그녀의 재산은 146억달러, 세계 44위이다. BMW 지분 이외에도 화학업체 알타나의 지분 50.1%도 상속했다. 그녀는 알타나를 독일 30위권 기업으로 키운 뒤 2006년 화학부문만 남기고 제약사업을 45억 유로에 니코메드에 매각해 막대한 배당을 챙겼고 지분을 100%까지 늘렸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에서 광고 전공으로 MBA를 했고, BMW에서 견습으로 근무할 때 만난 동료 엔지니어 얀 클라텐과 90년 결혼해 3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

슈테판 역시 작년 한해 BMW 주가가 2배로 뛴 덕분에 100억달러대 자산가로 올라섰다. 올 초 집계된 재산 규모는 107억달러. 누나인 주자네와 함께 BMW 감독이사회에 참여하고 있는데, 결국엔 그가 감독이사회 의장이 될 거란 얘기도 나온다.

요한나는 헤르베르트 콴트의 비서로 일하다가 그의 세번째 부인이 됐다. 헤르베르트는 3차례 결혼에서 모두 6명의 자녀를 뒀는데 나중에 회사 지분이 갈갈이 찢겨 가족 분쟁의 소지가 되는 걸 막기 위해 계열분리처럼 회사를 떼어주는 방식을 택했다. 요한나와 그 아들ㆍ딸에게는 BMW를 물려준 것. 남편의 뒤를 이어 BMW 대주주가 된 요한나는 82~97년 감독이사회 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이들도 헤르베르트와 마찬가지로 일상적 경영에는 간섭하지 않지만, 대규모 투자건 등 주요 사안에 대주주 권한을 적극 행사하고 있다. 1990년대 BMW가 영국 로버자동차 인수 실패로 고전하자, 99년 콴트 가가 베른트 피세츠리더 당시 회장을 문책해 경질하고 로버 매각을 결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주자네가 2008년 섹스스캔들로 곤욕을 치른 적을 제외하고는 조용한 사생활도 콴트 가의 공통점이다. 주자네가 콴트의 상속녀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직장에서 칸트라는 가명을 썼는데, 심지어 지금의 남편과 만날 때도 자신이 누군지를 숨긴 것도 유명하다.

그러나 콴트 가문에도 씻을 수 없는 오점은 있다. 2차대전 당시 강제수용소에서 차출한 3만여명의 노예노동으로 공장을 돌렸다는 가족사의 굴레 때문. 부의 축적은 대체로 누군가의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우쳐주기도 한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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