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를 또 찾았다. 경주만큼 할 것 많고 볼 것 많은 여행지도 드물다. 감포의 푸른 바다를 만날 수도 있고 신라 천년의 역사를 더듬을 수도 있고, 보문단지의 쾌적한 시설에서 여유로운 쉼을 만끽할 수도 있다.
이번에 경주를 찾게 만든 건 김유신이란 인물이다. 최근 본 영화 '평양성'에서의 김유신 캐릭터가 개인적으로 워낙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경주를 찾기 전 신라문화원에 김유신의 유적을 볼 수 있는 건 어떤 것이냐 물었더니 하루에 다 둘러보기 힘들 정도로 많다고 했다.
경주에 도착해 처음 찾은 곳은 선도산이었다. 경주 국립공원은 소금강, 토함산, 남산, 단석산, 서악, 화랑, 구미산 지구로 나뉘어진다. 선도산은 서악지구에 속한 산으로 380m 높이의 나지막한 봉우리다. 산 기슭의 왕릉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올랐다. 솔숲을 얼마 지나지 않아 새까맣게 타버린 산자락과 만난다. 몇 해전 산을 휘감은 화마의 참혹한 흔적이다. 아름드리 소나무들은 선채로 숯이 되고 말았다. 까만 솔가지가 파란 하늘을 이고 있었다.
선도산은 김유신의 두 여동생과 인연이 있다. 언니인 보화가 이 서악(선도산)에 올라 오줌을 누었는데 그 오줌이 넘쳐 서라벌이 잠겨버리는 꿈을 꾸었다. 보화가 망측해하는 이 꿈을 동생 문희가 비단을 주고 샀고, 동생은 훗날 김춘추와 결혼해 왕후에 올랐다.
선도산 아래엔 김유신의 매제가 된 김춘추, 태종무열왕의 능이 있다. 신라의 왕릉중 실제 그 주인이 확실히 밝혀진 건 몇 안 된다. 김유신 묘나 선덕여왕릉 등도 실제 무덤의 주인이 그들임을 밝혀주는 증거는 없다. 다만 사료에 근거해 추정할 뿐이다. 어떤 건 무덤의 주인 대신 그곳에서 나온 천마 그림, 금관이 능의 이름을 대신하기도 하다.
하지만 태종무열왕릉은 확실하다. 능 앞의 거북이가 이고 있는 비석에 '태종무열대왕지비'란 돋을새김 된 글자가 있기 때문이다. 태종무열왕릉비는 이 글자 외에도 거북의 모양새로 의미 있는 유적이다. 목을 앞으로 쭉 뻗은 거북의 모습에서 삼국을 통일한 진취적인 기상을 엿볼 수 있다. 신라문화원 문화해설사인 박택선씨는 "신라 말기에 이르면 이런 거북들이 애완견처럼 변해간다. 목에 목걸이를 걸고 있기도 하고 거북의 모양에서 힘과 기상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무열왕릉비 거북의 입 부분은 붉다. 조각 당시 바위의 붉은 부분을 일부러 입 쪽으로 계산해 깎았을 것이다. 이 붉은 색이 불을 뿜는 거북을 형상화했다.
태종무열왕릉 바로 옆엔 서악서원이 있다. 이 서원이 모시는 분은 모두 3명. 김유신, 설총, 최치원이다. 특이하게도 신라의 인물을 모신 서원이다. 1561년에 지어진 서원은 처음엔 김유신의 위패를 모시기 위한 사당이었다. 이후 지역 유림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설총과 최치원의 위패도 함께 모시게 됐다. 뒤에 사액서원이 됐고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조치 때도 다행히 존속할 수 있었다.
이제는 김유신 유적의 하이라이트인 김유신장군묘다. 선도산 바로 옆 동화산(147m) 자락에 있다. 장군묘로 가는 도중 알천의 천변길을 달린다. 김유신장군길이란 이름의 이 길 양옆은 모두 아름드리 벚나무가 심어져 있다. 해설사 박씨는 "경주의 벚꽃길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했다.
김유신장군묘로 오르는 돌길은 운치가 있다. 이 길의 분위기가 좋아 일부러 찾는 이들이 있을 정도다. 김유신장군묘는 크고 화려하다. 큰 봉분의 둘레를 돌벽이 두르고 있고 또 이를 돌기둥이 한번 더 둘렀다. 돌벽엔 정교하게 새겨진 십이지신상이 조각돼있다.
아무리 위대하다고 해도 장군인데 어째 왕의 무덤보다 크고 화려한 걸까. 문화해설사 박씨는 "김유신 장군이 뒷날 흥덕왕때 흥무대왕으로 추봉됐다"고 설명했다. 장군묘가 아닌 어엿한 왕릉이란 것.
능 앞 비석에도 왕릉이란 글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 비석도 처음엔 묘로 새겨졌었다. 70년대 다시 보수하면서 맨 마지막 글자인 '묘(墓)'자를 지우고 횟가루를 발라선 '능(陵)'자를 새겨놓았는데 물을 뿌리면 옛 묘자가 선명히 드러난다. 비오면 글자가 달라지는 비석으로 소문이 나면서 '비석의 비밀'을 시연하는 물세례 때문인지 비석의 아랫도리는 항상 축축히 젖어있다.
월정교 인근 남천변엔 장군의 집터가 있다. 그곳에 남아있는 건 우물 하나. 재매정이다. 에 따르면 장군은 백제와 싸워 크게 이기고 개선하던 중 백제가 다시 침공했다는 급보를 받았다. 집에 거의 다 왔지만 다시 말머리를 돌려 전장으로 향한 장군은 자기 집 앞을 지날 때 집에 들리지 않고 병사를 시켜 이 우물의 물을 떠오게 했다. 물을 마신 장군은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 한마디만 남기며 군사를 추슬러 전쟁터로 떠났다고 한다.
남천 건너편 천원마을엔 장군과 천관녀의 로맨스가 스며있다. 술 취한 유신을 애인의 집으로 데려간, 자신이 애지중지하던 말을 단칼에 베어버렸던 현장. 천관녀의 집이 있던 곳이다. 천관녀는 이후 님이 대업을 이루기만 기원하다 세상을 떠났고 장군은 훗날 그 집터에 천관사를 짓고 그녀를 기렸다고 한다.
천관마을의 밭두렁에 천관사의 유적이 흩어져있다. 천관사 터에서 재매정이 있는 장군의 집터는 그리 멀지 않다. 고개만 살짝 들면 바라다 보인다. 가깝게 보이는데 가까이 할 수 없었던 사랑이 두 연인의 집터 위에 아련히 맴돌고 있다.
경주=글·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여행수첩/ 경주
KTX가 뚫리며 경주가 가까워졌다. 새마을호로 경주까지는 서울에서 4시간 40분. KTX는 이를 2시간 2분으로 줄였다. 기름값이 비싼 요즘엔 열차 여행이 시간도 절약되고 효율적이다. KTX신경주역은 시내에서 떨어져 있다. 시내까지는 시내버스나 택시를 타고 들어가야 한다.
경주엔 KTX 등장과 함께 '천년마중' 택시 서비스가 등장했다. 경주의 역사를 공부한 해설사급 택시기사들이 승객을 여행 가이드까지 해주는 서비스다. 신라문화원에서 개설한 경주 문화관광 소양교육을 마친 29명의 기사들이 참여한다. 기사들은 친절 교육은 물론 경주 곳곳의 문화재에 대한 전문가급의 지식과 싸고 푸짐한 지역 맛집정보, 사진촬영 기법, 지역 역사와 옛 이야기에 대한 풍부한 상식들을 쌓았다. 택시 대여비는 하루 10만~15만원이다. (054)775-7979
신라문화원은 매달 보름 인근에 맞춰 진행되는 인기프로그램인 신라달빛기행을 4월 9일부터 시작한다. 유적답사 국악공연 탑돌이 등이 이뤄진다. 참가비는 2만원. (054)774-1950
김유신장군 유적이 밀집된 선도산 인근의 맛집으론 무열왕릉 바로 옆의 보명식당(054-777-2949)을 추천한다. 전형적인 시골 스타일의 토끼탕(사진), 닭백숙, 민물매운탕을 잘한다. 보문단지의 식당으론 최고급 한우와 함께 방금 지어낸 무쇠솥 밥맛이 좋은 운수대통(054-763-6767)이 좋다. 화산 한우단지에서 이름이 나 보문단지로도 진출했다. 남산 자락엔 1인 1만원만 받고 푸짐하면서 정갈하게 한정식을 차려내는 소나무정원(054-746-0020)이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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