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도호쿠 대지진/피해 현장]교민 한귀연씨 가족 열흘만의 극적 상봉아버지는 병원, 모녀는 집에 있다 생이별엿새만에 연락 닿고도 길 막혀 또 가슴앓이"전 재산 쓸려 갔어도 가족이 있으니 든든해"
"울 힘도 없었어요. 일단 살려고 발버둥쳐야 했어요."
23일 오전 일본 센다이(仙台) 총영사관에 마련된 교민 대피소. 한귀연(57)씨와 이수미(42)씨 부부는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외동딸 선아(5)는 두 손 가득 든 과자를 연신 입으로 털어 넣었다. 아이는 밝게 웃었다. 아이의 웃음에 부부도 미소를 지었다. 이씨는 "겨우 좀 살 것 같다"고 했다. 한씨는 "살아만 있어달라고 얼마나 기도를 했는데, 이제 여한이 없다"고 말했다.
부부는 일본 도호쿠(東北) 대지진 발생 열흘 만인 21일 마침내 '상봉'했다. 지난 11일 센다이의 병원에 입원 중이던 한씨, 70㎞가량 떨어진 이시노마키(石卷) 집에서 선아와 함께 있던 이씨는 지진과 함께 생이별을 했다. 한씨는 "아내에게 1,000번은 전화를 시도한 것 같다. TV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했다"고 털어놨다. 부인 이씨의 휴대폰이 작동하기 시작한 16일, 이시노마키 대피소까지 길이 뚫린 21일까지 휴대폰은 먹통이었고, 길은 막혀 있었다.
부부는 서로의 생사 걱정에 앞서 일단 버텨야 했다. 이씨는 "무섭고 춥고 배고픈 대피소 생활"이라고 했다. 선아와 이씨는 아무 것도 챙겨오지 못한 채 집에서 가까운 초등학교 대피소에서 1,500명의 주민과 생활했다. 전기는 들어오지 않았고, 난방 장치도 작동하지 않았다. 쓰나미 추가 피해 우려로 1, 2층이 폐쇄돼 3층에 피난 주민이 몰리는 바람에 새우잠을 잘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먹거리였다. 이씨는 "처음 이틀간은 유치원 다니는 아이까지만 밥을 줬다. 삼각김밥 반 조각이었다"고 했다. 그것도 하루에 두 번뿐이었다. 식수도 없었다. 가지고 있던 500㏄ 가량 되는 물을 조금씩 나눠 먹었다. 이씨는 결국 폐허가 된 집으로 향했다. 마을 곳곳에 수습이 안 된 시체가 보였다. "무서웠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죄송합니다' 인사를 하고 남의 집도 들어가 먹을 수 있는 건 다 긁어 왔죠."
병원 대피소에 있던 한씨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 하루에 두 번 식사가 나왔다. 딱 한 입에 들어갈 정도 크기의 주먹밥이었다.
한씨는 틈만 나면 전화기를 들고 부인의 휴대폰 번호를 눌렀다. '혹시'하는 마음이 나날이 커졌다. 살아만 있으면 뭐든지 하겠다는 기도를 몇 번이고 했다. 가족과 연락이 끊긴 지 6일이 지나고서야 부인 이씨가 전화를 받았다. 한씨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씨의 첫 마디는 "선아가 빵을 안 먹는다"는 것이었다. 한씨는 왈칵 눈물이 났다.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길이 막혔고 기름도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났다.
부부는 21일 만났다. 이씨가 차를 몰고 한씨를 찾아왔다. 이씨는 "물에 젖었던 우리 집 차가 신기하게도 움직였다"고 말했다. 부부는 당분간 영사관에서 지낼 예정이다. 한씨는 아직 치료가 덜 끝나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선아는 그새 영사관 분위기에 익었는지 함께 지내는 대피 주민에게 다가가 장난을 걸었다.
한씨는 선아를 가리키며 조심스레 말했다. "며칠 전만해도 가족만 무사하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더니 이젠 살 길이 막막하네요. 쓰나미가 전 재산을 다 쓸어가 버렸거든요. 사람 참 간사하죠, 그래도 가족이 있으니 든든합니다."
센다이(미야기현)=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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