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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29>‘드디어 고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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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29>‘드디어 고향으로’

입력
2011.03.22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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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 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여 년에

청춘만 늙어

꽤나 오래된 대중가요는 이같이 타향살이의 서러움에 겹친 향수를 노래하고 있다. 고향 떠난 십여 년만 해도 그런데, 이십 여 년, 삼십 여 년이면 무엇이라고 노래하여야 하는 걸까? 아니 사십 년 가까우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지경이면 청춘만 늙는 게 아니다. 인생이 온통 저물고 또 기울고 말 게 아니던가!

서울살이, 근 사십년!

그것은 6ㆍ25 전쟁이 갓 끝나고부터 1991년까지의 세월이다. 대학 학부 마치고 대학원 끝내고부터, 정년을 6년 앞둔 채로 서울에서의 교수 자리를 일단 마감하기까지의 세월이다. 강산이 변해도 네 번을 변했을 것이다.

대학에 사표를 내었을 때 학교 당국은 무슨 변고냐고 의아해했다. 동료 교수들은 다들 해괴하다고 했다.

이유가 고향 가기 위해서라니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아직 60살도 안 된 나이에 고향에 간다는 그 오직 한 가지 이유로 30년 가까이 몸담아 온 현직을 내던지다니 말도 안 된다고 했다. 나로서도 당돌하다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니, 남들은 오죽했을까?

내게 서강대학은 기가 차게 좋은 대학이었다. 속된 세상에서는 뭐라고 하건, 내게는 명문의 또 명문이었다. 나의 학문의 둘도 없는 보금자리였다. 모교에서 오라는 것도 머뭇거림 없이 고개 저었다.

학교 당국은 언제나 교수들에게 자상했다. 교수에게 뭘 해주는 것이 최선인가를 늘 배려하고 있었다. 그 당시로는 보수도 전국 최고였다.

학생들은 부지런하고도 열정적이었다. 캠퍼스 안은 언제나 학습의 열기로 뜨거웠다. 그러다 보니 교수들과 학생들 사이는 언제나 끈끈하고도 다사로웠다. 대학으로서는 더 바랄 데도 바랄 것도 없었다.

그런데 정년을 자그마치 여섯 해를 앞두고는 그만두겠다니? 병을 앓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사표를 합리화할 어떤 객관적인 구실도 찾을 수 없었다.

오직 하나의 구실은 고향으로 가겠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다른 어떤 동기도 이유도 없었다. 귀향! 그게 전부였다.

칼 융 일파의 분석심리학에서는 인간에게는 누구나 ‘모태 복귀의 본능’이, 이를테면 각자가 태어난 어머니의 태속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본능이 본인도 모르는 그 마음 속 깊은 곳에 응어리져 있다고 말한다.

그 보기를 들자면 끝이 없을 것 같다. 그 중에서도 스필버그 감독의 걸작인, ‘인디아나존스’는 대표적이다.

주인공들이 좁은 굴길로 해서 지하의 꽤나 넓은 광장에 들어갔다가는 모험을 하면서 다시 또 좁은 굴길로 해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그 과정은 모태 복귀 본능의 표본과도 같은 것이다.

또 있다. 우리의 단군신화가 그렇다. 곰이 굴속에서 일정한 시간을 보낸 다음, 비로소 여자로 거듭나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곰이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가 되는 것이다.

이들 두 가지 보기에서 굴이며 굴길은 모태를 상징하고 있다.

해서 우리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사무칠 때, 누구나 인디아나 존스가 되고 또 웅녀가 된다.

그와 같은 모태복귀의 본능이 내게서도 일어난 것일까? 40년에서 단 한 해 모자라게, 온 몸과 마음을 맡겨오던 기차게 좋은 직장을 하루아침에 문득 그만두겠다는 것은 그 때문이었을까? 서울살이에 싫증을 낸 것도 천만 아니다.

그렇다. 내게서 모태 복귀의 본능은 남달리 융숭했을지도 모른다. 고향을 생각할 적마다 나는 문득 젖먹이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경남 고성군 고성읍의 덕선리, 그 안태 고향을 나는 어머니 품에 안긴 채로 떠났다. 부산서 소년으로 자라는 동안, 그저 두어 번 정도 다년 온 것뿐이다. 향수라고 해도 따로 지목해서 얘깃거리로 삼을 것은 별로 없었다. 내가 태어난 집이 그냥 남아 있긴 했지만, 그것을 둥지니 보금자리니 할 만한 기억은 내게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고향 그리움은 더 한층 애틋했는지도 모른다. 오래오래 살 만큼 산 끝에 떠난 고향이라면, 향수는 덜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다 산수가, 자연이 나의 귀향을 채근했다. 고성만과 자란만의 바다가 그랬다. 그 바다를 에워싼 무이산이며 향로봉이 또한 그랬다.

산봉우리들에 둘러싸인 바다가, 왠지 나를 감싸주고 품어 주는 것 같았다. 아늑한 동굴 같게도 느껴졌다. 그것은 돌아 온 철새를 위한 둥지였다.

그렇게 귀향하였을 때, 서울의 어느 신문은, 그걸 보도하면서 사회면 기사에다가, ‘잘 나가던 삶 접고 고향으로 돌아가다’라고 제목을 달았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기왕의 잘 나가던 삶에 이어서 더 잘 나가는 장차의 삶을 택한 것뿐이다. 그래서도 나의 귀향은 금의환향(錦衣還鄕)이었던 것이다. 내가 비단 옷 입고 귀향한 게 아니다. 고향이 곧 비단 옷이었다.

강윤주기자 k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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