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통일 이후'에 대한 담론은 두 갈래 이유에서 아득하게 들린다. 첫째는 이명박정부 출범 후 냉전 시대로 퇴행을 거듭하는 정치 지형 탓이다. 둘째는 '이후'를 미리 고민하는 데 익숙지 않은 학계의 관행 때문이다. 최장집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가 발표되고 형식적 민주주의 구축 후의 정치ㆍ사회가 본격적으로 논의된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1987년 체제'로 통용되는 새 패러다임이 착종하고 10여년이 흐른 뒤였다. 훨씬 복잡한 작업이 될 통일 이후의 사회구조 분석을 지금 시도하는 것은, 그래서 질적 수준에 대한 평가에 앞서 무척 이례적이다. "통일은 결말이 아닌 시작이다"를 모토로 내세운 <통일 이후 통일을 생각한다> (푸른역사 발행)에는 그런 새로운 시도가 집적돼 있다. 지난해 10월 한림대에서 열린 2회 일송학술대회의 논의 내용을 모은 책이다. 통일> 민주화>
통일, 회귀가 아닌 건설
박명림 연세대 교수(지역학 협동과정)의 논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남북통일은 (분단 이전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60여년간 독자적으로 생존해 온 두 개의 한국을 단일국가로 새롭게 건설하는 과정이다." 그는 남과 북의 구성원들이 한 번도 단일 근대국민이었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왕정과 식민지 시기의 민족 개념과 근ㆍ현대의 국민 개념을 구분하는 관점이다. 따라서 통일은 "새로운 국가 건설인 동시에 새로운 국민 형성"이며 그때의 국민은 "최초의 단일 근대 국민이 된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남북이 통합에 대한 구체적 준비 없이 제도 통일의 과정에 돌입하면 극단적 사회 재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통일이 "제도 체제 국가 차원의 경성 요소(hardware)의 폐합"만을 의미하지 않고, 두 국민이 "전혀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는 탈북자들이 남한 사회에 융화하지 못하는 현실과 그 과정에서 진보 보수가 각각 보이는 무능 혹은 이중성을 지적하며 "통일의 완성은 연성 요소(software)에 의해 결정된다"고 강조한다.
박 교수는 남북통일을 두 한국의 변혁, (제도적) 통일, 통합 삼중 구조로 분석한다. 그리고 최선의 경로(내부 변혁_통일_통합)부터 최악의 경로(통일_변혁_통합)까지 다양한 상황을 베트남과 독일 등의 사례에 비춰 시뮬레이션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독일 통일이 유럽 통합의 과정과 겹쳐 일어났음을 상기시키며 "한국 통일의 과정이 동아시아 통합 과정의 한 부분이자 촉매로 작용하고, 동시에 새로운 통일 국민되기가 동아시아 공동체 시민되기와 맞물리는" 통합의 모델을 제시한다.
경제 통합으로 가는 관문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이 대통령의 통일세 발언이 나온 뒤 남북의 경제적 통합은 정치적 단일체 구축보다 직접적으로 피부에 닿는 문제가 됐다. 화폐 통합, 인구 이동, 대량 실업 등은 보혁의 경계를 넘어 닥쳐올 부담이기 때문이다. 김영윤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의 글은 급진적 방법으로 경제통합을 이룬 독일의 사례를 통해 남북한이 풀어야 할 과제를 점검하는 내용을 담았다. 김 연구위원은 통일 후 "계획경제로 억제돼 있던 물질적 욕구가 한꺼번에 남한 상품에 집중될 경우 북한 지역 생산 체계가 붕괴돼 대량실업을 피하기 어렵고, 그 경우 실업자들이 대규모로 남한 지역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 연구위원은 대량 실업에 대한 대안으로 일정 기간 단일 노동시장 형성을 지연시킬 방안을 제시한다. "북한 지역에서 남한 지역으로 이주할 자격을 고용주로부터 일정 기간 이상 고용을 보장받은 경우로 제한"하는 방안이다. 임금 체계에서도 특정 기간 북한 지역 기업에 대한 임금보조제도를 실시해 주민들의 높아진 경제 욕구로 인한 파산을 면하게 하는 정책을 제안한다. 그는 사유재산제 도입 역시 토지의 과다한 소유를 제한하는 제도 등의 도입 필요성을 강조한다.
언어 문화 교육… 통합의 과제들
남북통일 이후의 통합 문제는 법과 제도로 포섭되지 않는 영역에서도 광범위하게 표출될 것이 분명하다. 임홍빈 서울대 명예교수는 "남북 언어의 이질화에 대한 문제 제기가 통일을 위한 개념"이라고 전제한다. 그는 "남한의 한글맞춤법과 북한의 조선어규범집을 절충하는 것보다 어느 한쪽을 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독립운동의 법통 등 한글맞춤법의 정통성을 강조한다. 김재용 원광대 국문학과 교수는 <황진이> 와 <폭풍은 큰 돛을 펼친다> 라는 이질적 작품 세계를 보이는 북한 작가 홍석중의 사례에 주목해 "북한 문학계의 판도와 정황에 대한 이해야말로 문학적 통합의 필수"라고 주장한다. 폭풍은> 황진이>
이종재 서울대 명예교수는 남북한의 교육 구조를 분석해 통합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그는 "제도 통일을 넘어 남과 북의 국민이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북한 지역 교사들의 연수 프로그램 준비, 남북한 통합 교과서 시행, 북한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 조사" 등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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