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을 읽고 TV를 보며 이렇게 매일 울어 본 적이 없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는 눈물밖에 남지 않았다. 일본 도호쿠(東北) 대지진의 쓰나미 피해가 컸던 미야기(宮城)현 리후초(利府町) 종합체육관에는 300여 구의 시신이 수습돼 있다. 가지런히 늘어선 관 위에 하얀 국화와 함께 옷가지를 넣은 비닐봉지가 놓였다. 관이 모자라 하얀 시트로 말아놓기만 한 시신도 있다. 아직 누군지도 알지 못할 시체가 대부분이다.
야마다 히데코(61) 할머니는 대지진이 있고 1주일 만에 이곳에서 손자(3)와 재회했다. “추웠지” 말 없이 누워 있는 어린 손자 앞에서 흐르는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아이의 엄마와 오빠는 찾지도 못했다. “엄마, 오빠도 꼭 데려올 테니 여기서 조금만 더 참아” 손자가 살았을 때처럼 그렇게 다정하게 말 붙이는 것 말고 더 이상 해줄 것이 없었다.
“실종자가 있다고 들어도 살던 집을 찾을 수 없다.” 아직도 주민 8,000명의 행방을 알지 못하는 미야기현 미나미산리쿠초(南三陸町)의 구조대원은 마을 전체가 쑥대밭 된 현장에서 어떻게 구조활동을 해야 할지 막막해 하고 있다. 설사 집을 확인해도 무너진 집 아래 사람이 있다는 보장이 없다. 쓰나미에 쓸려 갔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번 대지진 전까지 전후 일본의 최대 재해였던 한신(阪神)대지진 때 활약한 대원들은 가져온 음파탐지기나 이산화탄소탐사기 등 첨단 구조장비를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있다.
대재난을 맞은 일본을 돕기 위해 한국의 신문ㆍ방송이 성금 모금에 적극 나서고 있다. 한류 스타들의 기부도 줄을 잇는다. 대만에서도 마잉주(馬英九) 총통까지 출연한 TV 모금 생방송이 이어졌다. 미국은 월마트, 코치 등 기업이 성금과 물품 지원에 적극적이다. 피해 현장에서 구조ㆍ복구에 나선 주일 미군 1만여 명은 이번 활동을 ‘도모다치(친구) 작전(Operation TOMODACHI)’이라고 이름 붙였다. 영국신문 인디펜던트가 1면에 ‘감바레(힘내라) 일본 감바레 도호쿠’라는 글을 실어 일본을 응원했고 태국 영자신문 네이션은 ‘앞을 향해 걸어가자 일본’이라는 전면광고로 용기를 북돋웠다.
하지만 지진 이후 후쿠시마(福島) 원전 사고의 공포가 커지면서 일본을 탈출하려는 외국인도 적지 않다. 현재의 비자로 일단 일본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재입국 허가를 받기 위해 도쿄 입국관리국에는 평소의 10배를 넘는 1만 명의 외국인이 몰려들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에서 250㎞ 떨어진 도쿄(東京)조차 안심이 안돼 오사카(大阪) 등지로 사무실을 임시 이전하는 외국회사도 잇따르고 있다.
한국일보 도쿄지국 건물에 같이 입주한 영국 주간지의 도쿄지국장은 며칠 전 가족들과 함께 오사카로 피난을 갔다. 알고 지내는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 기자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체르노빌 경험도 있어 서양 사람들은 원전사고에 더 예민한 것 같다”고 말했다. 피난 가는 마음을 이해한다는 말이었지만 그의 표정은 왠지 씁쓸해 보였다.
일본 대지진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잠 자는 시간 빼고는 지진 이후 벌어지는 일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가 지금 일본을 위해 할 수 있는 건 무얼까. “한국일보는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느냐”고 요미우리 기자가 내게 물었다. “당신들이 피난 갈 때 알려 주면 그때 같이 가겠다”고 말하는 것밖에 없었다.
김범수 도쿄특파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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