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시베리아 자원개발을 위해 한창이던 바이칼-아무르철도 건설공사 현장 인부였던 19세 청년 블라디미르 리신. 35년이 지난 지금 그는 러시아 제1의 갑부이다. 20여년 전 페레스트로이카(개혁)라는 변화의 바람이 지나간 뒤, 러시아에는 ‘프롤레타리아의 성공신화’가 잇따라 등장했다. 러시아 4대 철강기업에 들어가는 노보리페츠크철강의 총수 블라디미르 리신(54) 회장 역시 프롤레타리아에서 입지전적 성공신화를 쓴 주인공이 됐다.
부(富)가 팽창하는 러시아
이달 9일 미국 포브스지가 발표한 재산 10억달러 이상 세계 부호 명단에서는 러시아 부호의 약진이 눈에 띄었다. 올해 새로 이름을 올린 39명을 포함해 러시아 부자는 모두 101명. 미국(413명) 중국(115명)에 이어 3번째로 많다. 특히 100대 부호에는 15명이나 포진해 있다. 러시아에서 억만장자가 급증한 이유는 이 나라의 주요 수출품인 석유, 광물 등의 국제가격이 지난해 크게 올랐기 때문이었다.
리신 회장도 작년 한해 재산이 82억 달러나 불어났다. 포브스에 따르면 올 2월 현재 그의 재산은 240억달러에 달한다. 세계 부호 순위도 지난해 32위에서 14위로 껑충 뛰었다. 하지만 그 역시 다른 러시아 부호들과 마찬가지로 재산이 자원 관련 분야에 몰려있다 보니,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엔 평가재산의 4분의3이 순식간에 날아가버릴 정도로 큰 충격을 받기도 했다.
철의 노동자에서 신흥 재벌로
리신 회장은 전형적인 노동자 계급 출신이다. 서시베리아의 석탄ㆍ철강산업도시인 노보쿠즈네츠크에서 그가 구한 첫 직업은 어느 탄광의 기술공. 금속 공장이 널려있는 도시이다 보니 별다른 선택의 여지 없이 금속공대를 졸업한 뒤 제철소에 일자리를 얻어 현장반장, 공장장 등으로 착실히 승진 코스를 밟아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세계적 부호가 될 기회가 느닷없이 찾아왔다. 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개혁ㆍ개방의 기치 속에 이뤄진 국영 기업의 민영화 조치가 내려진 것. 정치권력 즉 크렘린과 유착 하에 국영기업을 헐값에 인수함으로써 후에 러시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울리가르히(신흥 과두 재벌)들이 이때 대거 탄생했는데, 러시아 금속장관으로 임명된 직장 상사를 따라 모스크바로 진출한 리신도 그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리신 회장의 후견인은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 시절 금속 및 철강산업의 막강한 실력자로 떠오른 미하일-레브 체르니 형제. 92년 체르니 형제의 트랜스월드그룹(TWG)에 알루미늄ㆍ철강 수출 담당 임원으로 합류한 뒤 사바알루미늄, 마그니토고르스크 등 몇몇 철강 및 금속기업의 경영에 관여했다. 95년에는 노보리페츠크철강 이사로 임명된 뒤 98년에는 이사회 의장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다. 리신 회장은 스스로 오너가 되고 싶었다. 2000년 갈등을 빚어오던 경영진이 갈라서는 와중에 노보리페츠크철강의 지분을 인수했다. 처음에는 지분이 13%에 불과했으나 이후 러시아 4대 부호인 블라디미르 포타닌, 조지 소로스 등의 지분을 추가로 인수하며 지난해에는 지분율을 80%까지 끌어 올렸다.
리신 회장의 노보리페츠크철강은 성공가도를 달렸다. 다른 올리가르히들이 문어발처럼 사업영역을 확장하는 것과 달리 리신 회장이 철강업에만 집중한 덕분에 노보리페츠크철강을 가장 효율성 높은 회사가 됐다. 리신 회장이 직접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경쟁력의 원천은 “핵심 사업과 시너지가 낮은 값비싼 해외 자산 인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본업인 철강업에 도움이 되는 기업들은 거침없이 사들였다. 철광석과 제철용 유연탄을 채굴하는 광산을 샀고 수출이 70%에 달하는 수익구조를 고려해 흑해 투아프세 항만과 물류기업 유니버설카고홀딩을 인수, 노보르페츠크철강을 중심으로 하는 전ㆍ후방 수직계열화 전략을 구사했다. 철강 생산에 필요한 광물을 자급하는 사업구조로 재편한 결과 원자재 가격이 오를수록 기업가치가 더 오르고, 리신은 더 막강한 거부가 되는 부의 선순환 고리를 연결한 것이다.
조용한 울리가르히
한때 러시아 제1의 갑부였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가 그의 제국인 유코스그룹의 공중분해와 함께 몰락한 사례에서도 엿볼 수 있듯, 정경유착으로 일군 울리가르히의 성공이 항상 해피엔딩이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리신 회장은 다른 러시아 갑부와는 다른 평가를 받는다. 다른 울리가르히들이 유럽 축구클럽이나 요트를 사들이는 초호화 생활이나 스캔들에 휩싸였지만, 그는 그런 식으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적도 없다.
비결은 크렘린이나 언론과 적절한 거리를 둔 처세술. 러시아 경제전문지 피난스는 그의 성공비결로 “열심히 일하고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는 생활철학”을 꼽으면서도, 그의 이름 리신이 러시아어로 ‘여우’를 뜻한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그는 정치권력과 완전히 등을 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우굴’로 불리는 자신의 저택에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 등 정계 인사를 초청할 정도의 커넥션은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 사격연맹회장을 맡는 등 취미인 사격 분야에서는 활발한 대외활동도 펼치고 있다.
부의 지형도가 급속도로 변화하는 러시아에서 2년 연속 최고 갑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리신. 언제까지 1등으로 기억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돈에 대한 그의 철학은 평범하다.“열심히 일하면, 된다.”
문향란기자 iam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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