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릴 적 불장난하다가 혼나던 커서는 다방에서 탑을 쌓던 그 추억이 간들간들…
틱, 틱, 츠윽... 치지지직.
코흘리개 때였다. 어른들 몰래 성냥을 들고 나가 담벼락 옆 연탄재 더미 위에서 불을 켜본다. 가냘픈 손목으로 그어댄 가냘픈 성냥개비는 부러지기 일쑤. 불꽃은 쉬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여러 개비를 분지르고 나서 마침내 노랗고 빨간 불꽃이 피어 올랐다. 맨 처음 내 손으로 불을 만들었던 그때의 감동이란. 홀라당 집 태워먹을 거냐는 호된 꾸지람과 함께 집안으로 끌려들어가야 했지만 내게 첫 불을 건네준 성냥의 날카로운 기억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부엌의 석유곤로 옆에는 언제나 큼직한 성냥통이 있었고, 다방의 테이블엔 누군가를 기다리며 하나 둘 쌓아 올린 성냥탑들이 서있었다. 담배를 피우지 않는 여학생들도 카페에서 내놓는 성냥갑이 예뻐 취미로 하나 둘 서랍 속에 모아두곤 했다. 그 성냥이 어느새 우리 곁에서 사라져갔다.
우리나라에 성냥공장이 처음 지어진 곳은 1885년 서울의 양화진이라고 한다. 그 이듬해 인천 제물포에 성냥공장이 지어졌다는 기록도 있다. 1916년 인천 금곡동에 세워진 '조선인촌주식회사'는 큰 공장이었다. 신의주에 제재소를 짓고 그곳의 목재를 날라다 성냥을 만들었다. 신의주와 평양에도 공장을 두었다니 당시의 성냥은 간단한 산업이 아니었다.
이후 성냥공장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1970년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하지만 80년대 중국의 값싼 성냥이 들어오고 일회용 라이터의 등장으로 성냥의 불꽃은 더 오래 타오르지 못했다. 지금 국내에 남은 성냥공장은 경북 의성에 있는 '성광성냥공업사'가 유일하다.
세상이 어수선하니 마음이 싸늘하다. 마음의 따뜻한 불씨 하나 얻으러, 하나 남은 그 성냥공장으로 향했다.
의성읍 의성향교 바로 옆에 있는 성냥공장은 꽤나 넓었다. 슬레이트 지붕을 인 건물이 대여섯 채다. 마당 한쪽엔 성냥개비 재료로 쓸 통나무가 쌓여있다. 성냥공장은 크게 나무를 잘게 쪼개 성냥개비를 만드는 공간, 그 성냥개비에 유황과 인을 입히는 공간, 완성된 성냥개비를 통성냥이나 판촉성냥갑에 포장하는 공간으로 나뉜다.
성냥개비의 목재는 포플러 나무를 쓴다. 성광성냥의 손학인(44) 상무는 "70, 80년대 가로수로 쉽게 봐왔던 포플러는 대부분 성냥공장에서 심은 것들이다"라고 했다. 과거 성냥공장간 경쟁이 치열할 때는 목재 확보가 사업 성공의 관건이었다. 성냥공장들이 나서 포플러를 심었고, 그걸 베어다 성냥을 만들었다.
쭉쭉 뻗은 포플러는 잘 마르고 가벼운데다 10년만 키워도 충분히 쓸만한 크기로 자란다. 성광성냥측은 지금은 생산량이 줄어 일부러 포플러를 심지 않는단다. 손 상무는 "그 많던 포플러 나무가 거의 사라진 건 성냥공장의 쇠퇴와 연관이 있다"고 했다.
통나무는 건조작업을 거쳐 홍두깨 굵기의 원통으로 잘려진다. 이걸 얇게 깎아 종이처럼 2.2㎜ 두께로 편 다음 잘게 채 썰어 성냥개비를 만든다. 다음 건물에선 성냥개비에 인과 황 등을 혼합한 액을 바른다. 자동으로 그 액을 바르는 기계가 윤전기다. 신문을 찍어내는 윤전기와 그 생김새도 비슷하다. 공장에는 이런 윤전기가 한 대 더 있었는데 몇 년 전 방글라데시로 팔아 넘겼다. 두 대를 돌릴 만큼 수요가 없어서다. 이들 기계는 모두 국산으로 주문 생산한 것들이다.
한창 잘나갈 때 공장엔 250명이 넘는 인부들이 일을 했다. 의성읍내에 성냥갑 제조 등 성광성냥의 부속공장만 6개가 더 있었다. 성광성냥이 의성에서 가장 큰 사업체였을 때 이야기다. 읍내 500명 이상이 성냥 때문에 돈을 벌었던 시절이다.
지금은 9명만 일을 한다. 50세가 넘은 아주머니 7명과 아저씨 2명. 인원이 적다 보니 일도 분업이 아닌 공동작업이다. 하루는 나무만 쪼개고, 또 하루는 인과 황만 입히고, 그 다음날은 함께 성냥을 포장한다.
성광성냥에서 나온 성냥의 브랜드는 '향로'다. 예전 성냥공장들은 소주처럼 서로 지역을 나눴다. 유엔성냥은 서울과 경기, 비사표는 호남과 충청지역을, 영화인촌은 강원과 충북의 북부지역이 주 판로였고, 향로는 경북지역과 함께 부산서 강원 고성까지의 바닷가가 대상이었다. 뱃사람들에겐 습기에 강한 이곳 성냥이 필수였다고 한다.
손 상무는 "인과 황의 혼합액엔 11가지 재료가 들어가는데 부친이 자신만 아는 비법으로 재료의 배합비율을 적용, 특히 습기에 강한 성냥을 만들었다"고 했다. 성광성냥 상표에 있는 청둥오리 이미지도 뱃사람이 좋아하는 성냥이라 그려 넣은 것이란다. 배 가라앉지 말라고.
손 상무는 성냥공장 말고도 대구에서 광고기획사를 운영한다. 광고용 성냥을 위해 시작한 사업인데, 성냥공장의 적자를 메우기 위해 지금은 다른 판촉ㆍ홍보물을 제작하고 있다. 손 상무는 "기획사에서 번 돈으로 아주머니들 월급을 보충해준다"고 했다.
마지막 성냥공장의 운명도 바람 앞의 성냥불만큼이나 아슬아슬하다. 사명감과 명맥을 잇기 위해 버텨보려 하지만 쉽지 않다. 손 상무는 "국내 유일의 성냥공장 시설을 아이들 체험공간이나 성냥박물관 같은 전시공간으로 활용했으면 해서 여러 번 도움을 요청했지만 관에선 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며 아쉬워했다.
■ 여행수첩
의성 사곡면 화전리 일대는 전국에서 유명한 산수유마을이다. 봄빛보다 노란 산수유가 마을의 고샅과 개천을 따라 예쁘게 수놓는다. 올해의 산수유축제는 26일 시작해 4월 10일까지 이어진다. 마을 입구 행사장에서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되고 마을 주민들이 내놓는 전통 음식도 맛볼 수 있다.
성광성냥이 있는 의성읍이나 탑리 5층석탑이 있는 금성면 등으로 가려면 중앙고속도로 의성IC에서 나오는 게 빠르다. 의성IC 인근의 봉양에는 탑산약수온천이 있다. 유황냉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봉양 읍내에는 의성마늘한우를 싸게 먹을 수 있는 한우타운이 조성돼 있다.
의성군청 새마을문화과 (054)830-6356
의성=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 의성 장날의 구수한 풍경
마지막 성냥공장을 간직하고 있는 의성 땅엔 시간을 붙들어 맨 또 다른 풍경들이 가득하다. 만일 2,7일 장날이 열리는 때 의성을 들렀다면 의성장터를 그냥 지나치지 말자. 의성전통시장을 중심으로 풍성한 장터가 펼쳐진다.
시장의 볕 좋은 골목엔 묘목상들이 묘목들을 담벼락에 기대 늘어뜨려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할머니들이 좌판 위에 과일 채소 한 묶음씩 올려놓고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시장통 안 커다란 잉어와 붕어가 들어있는 물통 앞에선 어린아이와 상인간의 재미난 신경전이 펼쳐졌다. 신기하게 쳐다보는 아이에게 상인은 "한번 쳐다보는데 100원이다. 니는 두번 쳐다봤으니 200원 내야 한다. 돈 있나? 없음 보지마라"다그친다. 아이는 제 엄마를 애원의 눈빛으로 쳐다보지만 부모는 "내 돈 없다. 니가 알아서 해라"며 싱긋 웃는다.
뻥튀기가 펑펑 폭죽을 튀겨내고 의성장날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연탄불 닭발석쇠구이의 굽는 연기가 시장 지붕 위로 퍼져 오른다. 감기만 하면 머리가 까매진다며 염색약을 파는 상인, 직접 쑤어온 묵을 들고와 썰어 내놓는 아낙도 시장의 활기를 돋운다.
시장 입구 철공소 앞에는 빈 의자 9개가 줄지어 놓여있다. 장보러 온 이들 잠시 쉬었다 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구경할 게 많은 장날이라서인지 빈 의자엔 따뜻한 봄볕만 내려앉았다.
의성 금성면에는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화산이라는 금성산(531m)이다. 그 산에서 뿜어져 나온 화산재를 양분 삼아 자라는 것이 유명한 의성 육쪽마늘이다. 금성면의 중심 마을인 탑리는 마치 드라마 세트장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단층 건물이 늘어선 동네의 세탁소, 미용실, 사진관 등 삐뚤빼뚤한 글씨의 간판들이 그리 정겨울 수 없다.
국보 77호인 탑리 오층석탑 바로 앞의 미용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코가 매캐했다. 파마약 냄새 때문이 아니라 미용실 안에서 담그고 있는 고추장 때문이다. 미용실 주인인 임길자(78) 할머니가 동네 사람들과 함께 고추장을 담그다 객을 맞았다. 손님은 많으냐 물었더니 "다 늙은 할미가 하는 데 누가 오겠나.
친구들이나 찾아와 놀다 간다. 오면 같이 국수도 끓여먹는다"고 했다. 할머니는 "메주까리(메주가루) 들어가야 맛이 있다. 색깔은 좀 까무리하지만 그래야 잘 삭카진다"며 열심히 고추장을 저었다. 한두 마디 건넸을 뿐인데 할머니의 이야기는 끝이 없이 이어진다. 많이 심심하고 많이 외로우셨나 보다.
탑리 오층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면서도 벽돌탑인 전탑의 수법을 모방하고 또 목조건축의 양식도 띠고 있는, 우리나라의 석탑 양식의 변화를 살피는 데 매우 중요한 문화재다. 첫눈에 "참 잘생겼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탑에는 황톳빛 시간의 색이 곱게 내려앉아있다. 탑은 서있는 곳은 여학교 바로 옆. 홀로 선 탑은 여학생들의 생기발랄한 수다 소리를 들으며 외로움을 달랜다. 이 탑은 천 년이 넘는 동안 얼마나 많은 노래를, 많은 이야기를 듣고 서 있었을까.
의성=글ㆍ사진 이성원기자 sung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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