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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자취를 찾아서/ (하) 얀 후스의 프라하·칼뱅의 제네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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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의 자취를 찾아서/ (하) 얀 후스의 프라하·칼뱅의 제네바

입력
2011.03.17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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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은 지금 거위를 불태워 죽이지만 100년 뒤 나타나는 백조는 어쩌지 못할 것이다.”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1372~1415)가 이단으로 몰려 화형 선고를 받고 한 예언이다. 그대로 되었다. 백조는 독일의 마르틴 루터(1483~1546)다. 후스는 체코어로 거위란 뜻이다. 후스의 죽음은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보답을 받았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 구시청광장에 후스의 동상이 있다. 프라하의 명물인 천문시계탑이 근처에 있어 늘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죽음을 뜻하는 해골과, 인간의 유한성을 상기시키는 모래시계가 좌우에 조각된 이 시계는 정오가 되면 인형들이 나와 춤춘다. 그 짧은 공연을 보려고 고개를 치켜든 군중들 옆에서 후스는 자신이 사제로 있었던 틴성당을 바라보며 서 있다. 두 개의 첨탑이 우뚝 솟은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동상 아래에는 후스가 화형대에서 남긴 마지막 발언이 새겨져 있다. “진실만을 찾으라, 들으라, 배우라, 사랑하라, 말하라, 지키라, 죽기까지 지키라.”

후스는 신성로마제국 아래 있던 당시 보헤미아의 지성이었다. 프라하대 총장까지 지냈다. 신부였지만 그는 중세 교회의 타락과 부패에 저항했다. 교회가 모든 것을 지배하던 그 시절 교회에 맞선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지금의 스위스 베른 남쪽 콘스탄츠에서 열린 종교재판에서 그는 이단 선고를 받았다. 그리로 오라는 호출을 받았을 때 다들 위험하다며 가지 말라고 했지만 갔다. 신변 안전을 보장하겠다던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악마와 한 계약은 무효”라며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프라하의 구시청광장에서 바츨라프광장으로 가는 길의 골목 한 모퉁이에 있는 베들레헴교회는 후스가 설교했던 곳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비교적 소박한 교회다. 지금은 콘서트 장소로 쓰이고 있다.

신부가 라틴어로 설교하던 그 시절 후스는 체코어로 설교했다.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서 그는 보헤미아 민족주의의 상징이었다. 그의 죽음은 체코 민족주의에 불을 당겼다. 후스의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농민들이 봉기했다. 그들은 프라하 외곽 타보르전투에서 패배해 궤멸됐다. 피의 희생은 계속됐다. 1621년에는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귀족 27명이 한꺼번에 화형을 당했다. 프라하 시내 후스의 동상 옆 광장 바닥에는 그들을 기억하는 27개의 십자가가 그려져 있다. 후스가 체코에 뿌린 종교개혁의 씨앗은 17세기 유럽 전역을 휩쓴 30년전쟁이 1648년 막을 내릴 때까지 계속 자랐다. 구교에서 분리된 신교는 끝내 자유를 쟁취했다.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후스는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의 밀알이 되었다. 루터는 구교와 싸우는 것만으로도 벅차 신교의 틀을 굳히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루터가 남긴 숙제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장 칼뱅이 해냈다.

프랑스에서 태어나고 공부한 인문주의자 칼뱅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완수했다. 그는 제네바를 종교개혁의 메카,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로 만들고 싶어했다. 그는 시민들에게 엄격한 종교 생활을 요구했다. 복장과 춤까지 종교법으로 규제하고 시민 생활을 감독했다. 삼위일체를 부인한 세베르투스 처형에 관여하는 등 완고한 원칙주의를 강요해 ‘제네바의 독재자’로 불리기도 했다. 그로 인해 시의회와 충돌해 한때 제네바를 떠나 망명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오늘날 스위스인들의 절제와 금욕 기질은 칼뱅의 제네바가 남긴 유산이기도 하다.

칼뱅주의는 스위스를 넘어 서유럽으로 확산됐다.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회, 네덜란드 신교, 영국 국교회와 청교도혁명이 그 영향을 받았다. 제네바 시내 바스티용공원에 있는 종교개혁가 기념상은 칼뱅의 개혁교회가 어떻게 뻗어나갔는지 보여 준다. 칼뱅을 제네바로 불러들인 파렐과 칼뱅의 제자 베자, 스코틀랜드 장로교를 일군 존 녹스가 칼뱅과 나란히 서 있는 석상이다. 칼뱅의 표정은 단호하고 엄숙해 보인다.

루터 전후, 후스와 칼뱅이 걸어간 길은 200여년에 걸쳐 진행되고 마무리된 종교개혁의 시작점이자 마침표다. 그 길에 뿌려진 피와 투쟁이 오늘의 교회에 묻는다. 지금 교회는 바른 길로 가고 있는가 라고.

프라하ㆍ제네바=글ㆍ사진 오미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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