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후쿠시마(福島) 원자력발전소 주변의 방사선 수치는 단기간 노출로도 치명적일 만큼 높은 상태여서 향후 원자로 냉각작업을 진행할 수 없는 수준이다.”
일본인들이 방사선 피폭의 공포 속에서 겨우 잠들어있던 17일 새벽(이하 일본시간)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 그레고리 야즈코 위원장은 미 워싱턴시의 하원 예산관련 청문회에 출석해 단호한 어조로 원전사고에 대한 일본정부의 공식설명을 전면 부정했다.
야즈코 위원장은 “원전 4호기의 사용 후 핵연료봉을 보관하는 수조에 물이 남아 있지 않아 강력한 방사성 물질이 누출되고 있으며, 옆의 3호기도 비슷한 위험에 처해 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또 “일본 정부가 제공하는 정보와 별도의 독자경로로 정보를 수집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일본 주재 미국대사관에 사고원전 반경 80㎞ 이내 미국인 대피령을 권고한 것”이라며 일본 정부의 발표에 대한 불신감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전날 오후 일본 주재 미국대사관은 일본정부의 공식 대피 반경 20㎞를 훨씬 넘어선 대피령을 발령해 재일 외국인은 물론 일본인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준 것에 대한 해명이다. 야즈코 위원장의 발언에 대해 뉴욕타임스(NYT)는 “매우 중요한 순간에 미국과 아시아의 가장 긴밀한 우방국 사이에서 균열이 생겼다”고 평했다.
17일 날이 밝자 경제산업성 원자력안전보안원은 황급히 야즈코 위원장의 발언을 부인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못해 4호기 수조에 물이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건물 주변의 방사선량으로 추정할 때 심각한 문제는 없다”는 자신감 없는 어조였다.
비슷한 시각 일본정부는 자위대 헬기를 동원 야즈코 위원장이 위험성을 지적한 원전 3ㆍ4호기에 물을 퍼부었다. 그러나 강풍으로 물이 대부분 허공으로 흩어져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 광경을 NHK방송으로 지켜보던 일본인들은 정부의 무기력한 대응에 절망감을 토로했다. 도쿄에 거주하는 요시다 마사시(53)씨는 “정부 관료들이 원전사고로 공포감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정치인들이 10여 년간 일본에서 사라진다면 일본 사정이 훨씬 좋아질 것”이라고 로이터통신에 분통을 터뜨렸다.
12일 후쿠시마 원전 1호기 외벽이 폭발했을 당시 원전운영사 도쿄전력은 “큰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감시카메라에 찍혔으며, 현재 원인을 조사 중”이라는 발표를 내놓은 것이 전부였다. 이후 점점 사건은 겉잡을 수 없이 확산됐으나 도쿄전력의 기자회견은 모호한 표현과 이전 발표와 상충되는 내용, 기초적 사실마저 부인하고 왜곡하는 것에서 별다른 변화가 없다. 일본 정부도 최근까지 이 같은 도쿄전력의 축소지향적 정보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NYT는 현재 일본 상황을 “2차대전 이후 일본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고 결단성을 갖춘 정부가 절실한 상황에서 가장 나약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취약한 정부의 모습이 노출됐다”고 요약한다. 이어 은폐에 급급해하는 일본 원전당국의 자세가 의사가 암 확증판정이 나와도 환자에게 알려주지 않을 정도로 상대방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기 꺼리는 일본 고유문화와 2차대전 원폭피해에 대한 깊은 상처에서 나온 것이라는 해석을 덧붙였다.
원전당국의 ‘은폐 성향’의 원인이 무엇이든 후쿠시마 원전 주변 주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른다. 후쿠시마현 사토 유헤이(佐藤雄平) 지사는 “중앙정부에 상황을 문의하지만 한번도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주지 않는다”며 “정부의 발표만 믿고 고향에 남은 사람들은 식량도 절대 부족한 상황에서 완전히 고립돼 있다”고 로이터통신에 밝혔다.
정영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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