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은 한 순간이었지만 상처는 영원히 남을 듯했다. 일본 도호쿠(東北) 대지진 발생 10일째. 최악의 피해를 입은 미야기(宮城)현 게센누마(氣仙沼)와 미나미산리쿠(南三陸) 지역은 여전히 쓰나미가 밀려올 당시의 처참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20일 오전 이와테(岩手)현 오슈(奧州)시에서 2시간가량 차로 이동해 도착한 게센누마시는 열흘 전과 별반 달라진 게 없었다. 쓰나미로 인해 형체도 없이 사라진 가옥들, 뒤집혀 땅에 박혀 있거나 엿가락처럼 휘어진 자동차, 불에 탄 채 뼈대만 남아 바다 위에 떠 있는 선박들. 그 사이로 일본 자위대와 복구팀이 현장 정리를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게센누마시청에서 나온 한 직원은 "치워도 치워도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주저앉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라고 했다.
집을 잃고 인근 체육관과 학교에 몸을 맡기고 있는 시민들은 애써 이런 상황을 외면하려는 듯했다. 대부분 고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무표정하게 지내고 있었다. "살아 있으니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게 한 주민의 말이었다. 게센누마시에 따르면 지난 18일 기준으로 392명이 사망한 것으로 공식 확인됐고, 343명이 실종 상태다.
그러나 감사의 마음과 별개로 현실은 현실이었다. 현재 게센누마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대피소는 99곳. 2만86명이 대피소에서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다. 게센누마 중학교에 마련된 대피소에서 만난 사토 데츠오(70)씨는 "춥고 배고프고 아프다"고 호소했다.
부족한 연료 때문에 대피소의 난방장치는 가동을 멈췄다. 구호품은 속속 도착하고 있지만, 정작 가스가 없어 조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수도관이 복구되지 않아 씻을 물조차 없다. 요시다 미에코(39)씨는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앞으로가 문제다"라고 털어놨다.
시 종합체육관에 마련된 또 다른 대피소의 임시 진료소에는 노약자들이 감기 증상 등을 호소하며 줄을 잇고 있었다. 하루 50명 정도밖에 진료할 수 없다는 게 진료소 관계자의 설명이다. 대피소 관리직원 요시다 히데오(58)씨는 "모든 게 열악하다. 지진 직후와 상황이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히데오씨 자신을 포함, 체육관으로 대피한 1,800여명의 시민들은 지진 이후 목욕은커녕 속옷조차 갈아입은 사람이 없다고 했다.
인구 1만7,000여명 중 1만여명, 쓰나미로 마을 주민 반 이상을 잃은 미나미산리쿠시는 복구라는 말 자체가 어울리지 않았다. 게센누마에서 해안도로인 45번 국도를 타고 미나미산리쿠로 가는 길은 고통스러웠다. 하시가미(階上) 등 마을 자체가 아예 사라져버린 곳이 부지기수다. 하지만 고통은 미나미산리쿠에서 극에 달했다. 참사 현장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집터를 보고 있던 모리코(60)씨는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자위대와 일본 전역에서 올라온 복구단은 모리코씨의 집터를 지나 이동했다. 이들은 열흘째 시신 수색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인근 마을에 마련된 대피소에는 1,500명가량의 주민들이 생활 중이다. 가장 어려운 게 뭐냐는 질문에 대피소 관계자는 "전부 다"라고 답했다. 와타나베 다케시(67)씨 부부는 "배고프고 못 씻는 것도 문제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가 걱정"이라고 했다. 와타나베씨는 지난 13일 집(터)을 가 본 후에는 발길을 끊었다. "마음이 무너지는 게 더 무섭다"고 그는 말했다.
다케시씨와 얘기를 나누는 도중 자위대의 헬기가 대피소에 도착했다. 헬기에서는 연료통이 쏟아져 나왔다. 자위대 병력들은 분주하게 움직여 이동화장실 등을 만들었다. 대피한 주민들을 위한 급식 계획도 세워졌다. 도로망은 상당 수준 복구돼 각지에서 구호품이 도착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천명에 달하는 이재민에게 이는 큰 위안이 되지 못하는 듯했다. 그들은 이미 '구호'로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있었다. 가족을 모두 잃고 대피소에서 지내고 있다는 후시요시(45)씨는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게센누마·미나미산리쿠(미야기현)= 남상욱 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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