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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사흘간의 동행] <10> KBS 공채 코미디언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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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현장, 사흘간의 동행] <10> KBS 공채 코미디언 시험

입력
2011.03.16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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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 웃기기·안 해봤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문 안쪽에서 계속해서 비명에, 통곡에, 노래까지 별의 별 소리가 다 들려온다. 할머니 복장을 한 곽범(24)씨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아, 아무것도 못했어”라며 한숨을 푹푹 쉰다. 도우미로 들어간 친구에게 “음악을 너무 늦게 틀었다”며 트집이다. 미안한 표정의 친구는 “내년을 기약하자”며 어깨를 감싸 안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내 특기가 남 탓 아니냐”며 한참을 지청구다. “개인기로 발차기를 할 때 바지가 터졌어야 하는데….” 연습 땐 매번 잘만 터지던 게 왜 하필 오늘 말썽인지 모르겠다고 안타까워한다.

KBS 공채 코미디언시험 모집 공고가 뜬 건 지난달. 웃긴다는 소리깨나 들었던 이들이 코미디언이 되겠다고 나섰다. 코미디언 지망생들의 로망이라는 KBS에 들어가기 위해 원서를 접수한 이는 모두 1,163명. 이 중 800여명이 1차 서류전형을 통과해 8일 2차 실기시험을 치렀고, 11일에는 80여명이 3차 최종면접을 봤다. 14일 발표된 최종 합격자는 15명. 77대 1이 넘는 경쟁을 뚫은 이들은 극소수였고 1,000여명이 쓴잔을 마셨다. 개중에는 ‘코미디언 한 번 해볼까’ 하고 가볍게 나선 이들도 있지만, 이 길 하나만 보고 코미디극단 등에서 수년간 실력을 연마해온 장수생들도 적지 않았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모두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곁에서 지켜본 이들의 도전은 결코 웃기지 않았다.

8일

#2분, 나를 보여 주기엔 너무 짧은 시간

오전반 집합 시간인 오전 9시께 응시자들 대기 장소인 KBS 신관공개홀 라디오홀은 그야말로 딱 봐도 웃기는 이들부터 좀체 웃길 것 같지 않은 심각한 얼굴까지 다양한 군상들로 가득했다. 쫄쫄이바지, 경찰 제복, 군복 등 의상도 가지각색. 얼굴을 도화지 삼아 한껏 낙서를 해 놓은 여성이나 할머니 가발에 몸뻬 입은 남성들도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응시자들은 이곳에서 대기하다 순번이 되면 무대 옆으로 난 통로를 따라 아래층 시험장으로 안내된다. 주어진 시간은 단 2분. 본인이 하고 싶은 자유연기와 개인기 두 가지를 다 보여 주기엔 턱도 없이 짧은 시간이다.

“떠들지 마세요. 안에까지 들려요.” ‘개그콘서트’ 막내인 동기들과 함께 진행요원으로 나와 응시자들을 안내하던 코미디언 김영희가 한마디 한다. 일순간 복도가 조용해진다. 까불대던 응시자들도 얼어붙었다. 그런 와중에도 중얼중얼 대사를 외거나 기도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응시자들이 모두 두렵게 쳐다보던 문이 열리고 이제 막 시험을 치른 송윤지(19)씨가 나온다. 하얀 소복을 입은 앳된 얼굴의 그는 흥분이 다 가라앉지 않아 아직 숨이 가쁘다. “목소리를 떨어서 망쳤어요. 괜히 심사위원이 안 쳐다보는 것 같고 눈치가 보여서. 이럴 줄 알았으면 렌즈는 빼고 올 걸. 눈에 뵈는 게 없어야 더 용기가 나는데.” 애국가를 부르고 나왔다는 그는 이번이 생애 첫 도전이라고 했다.

저쪽에서 ‘개콘’ 봉숭아학당의 까도남 복장을 한 여성 지원자가 보여서 진짜 까도남 송영길에게 데려가 인사를 시켜 줬다. 송영길은 실감 나는 연기를 위해 따로 분장을 하지 않고 여드름이 보이는 생얼로 왔다는 김혜나(22)씨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지금은 유명 코미디언이지만 송영길도 지난해에는 이들처럼 지망생 신분이었다. 그는 “시험 볼 때 너무 긴장해서 헛구역질을 100번은 했을 것”이라고 했다.

#웃기려는 자와 웃지 않는 자

양해를 구해 시험장에 들어갔다. 기대가 컸다. 바깥에서 지원자들이 얼마나 간절한 마음인지를 직접 봤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러나 처한 상황에 따라 누군가에게 절실한 그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상이, 또는 고역이 된다.

시험장은 두 곳으로 나뉘어 각각 7명의 심사위원이 앉아 있었다. 개그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PD와 작가, 예능국 부장 등이다. 앞에는 음료수가 3, 4개씩 놓여 있고 귤 과자 등 먹을거리도 쌓여있다. 아침부터 심사에 나선 이들은 꼼짝없이 자리를 지키느라 모두 퀭한 모습이었다. 실제 들어가서 본 지원자들의 개그는 지루한 구석이 많았다. 남을 웃긴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다.

“О번 ООО입니다. 도우미 О명입니다.” 도우미는 지원자를 보조하는 이들이다. 씩씩하게 인사한 후 개그를 시작하는 이 남자, 의욕이 너무 앞섰을까. 말이 자꾸 씹힌다. 개인기로 아이유를 부르는 박효신을 내놓았지만 심사위원들의 반응이 영 신통치 않다. 이어 군복 차림의 남성 지원자가 들어와 군대 개그를 한다. 중간에 잘 안 풀리자 “죄송합니다” 말해 보지만 “수고하셨어요” 가차없이 끊긴다.

수백 명의 지원자들 중 심사위원들의 웃음을 끌어낼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무표정 무반응에 상처받는 이들도 꽤 된다. 코미디언 지망생들의 인터넷 카페에는 ‘심사위원들과 눈을 마주치지 말라’는 조언도 올라와 있다. 무표정한 눈과 마주치는 순간 당황해서 대사를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제 할 말 다 하고 나간 지원자를 따라갔다. 서울종합예술대 개그MC예술학부 1학년이라는 송창근(20)씨는 대뜸 “요즘 대세 누구? 송창근”이라며, 이게 자신의 첫 인터뷰가 되는 거냐며 좋아한다. 사진도 찍어 달라며 포즈를 취한다. “어차피 KBS는 내가 다닐 직장이에요. 빨리 뽑아 주셔야 하는데.” 아직 실패를 겪어보지 않아서인가, 자신감이 넘친다.

오랫동안 마음속에만 품어 오다 어렵사리 용기를 낸 응시자들도 보였다. 양복을 얌전하게 빼 입은 K(24)씨에게 말을 걸었다. 대기업 면접을 보러 온 듯 어딘가 이질적 분위기가 느껴졌다. “원래 꿈이 코미디언이었는데 제대하고 시험 한 번 쳐 보고 싶어서요.” 사이비 교주 연기를 했다는 그는 “심사위원들이 웃어 줘서 위안이 된다”며 그래도 원풀이는 했다고 수줍게 웃었다. 명문대 통계학과 학생인 그는 주위에 시험 보는 걸 숨겼다며 이름은 밝히지 말아 달라고 했다.

곱게 화장을 하고 온 장세희씨는 올해 서른이 되면서 ‘마지막으로 한 번 해 보자’는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경북 포항시에서 고깃집을 한다는 그는 TV에서 시험공고를 보고 기회를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도전했다고 했다. 긴장하는 바람에 준비한 걸 다 못 보여 줘 울상을 짓고 있는 그의 옆에 선 어머니는 “얘가 진짜 웃기거든요. 진짜 웃긴데…”라며 더 아쉬워 한다. 전날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 근처 찜질방에서 묵었다는 모녀는 커다란 여행가방을 끌고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는 연신 딸의 등을 어루만졌고, 딸은 “괜찮다”며 웃었다.

11일

#파이널 무대 ‘꿈이 코 앞에’

이번에는 2차 실기시험 때와 반대로 아래층 희극인실에서 모여 있다가 라디오홀 옆 대기실로, 다시 라디오홀 무대에 꾸려진 시험장으로 들어간다. 80여명의 2차 시험 합격자는 그야말로 코미디언이 되기 위해 칼을 간 사람들. 대기실은 지난 번과는 비교할 수 없는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다. 조명까지 켜진 무대에 열댓 명이 넘는 심사위원들까지, 실로 엄숙한 분위기였다.

자유연기 지정연기 개인기까지 5분 안팎의 시간이 주어졌다. 긴 시간만큼 실력이 고스란히 드러날 수밖에 없다. 시간을 다 채우지 못하고 “여기까지입니다”라며 퇴장하는 지원자도 있었다.

마지막 문턱에서 몇 번 고배를 마신 장수생들이나 나이 많은 지원자들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시험을 마치고 도우미 역할을 하기 위해 무대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정현(28) 김정훈(28)씨는 표정에서 간절함이 우러났다. 이들은 개그 신인 등용문인 KBS ‘개그스타’에 출연하고 있다. 이번에 합격하면 공채 코미디언이 돼 ‘개콘’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시험에 임하는 각오도 남달랐다. KBS 최종에서만 세 번 낙방했다는 정현씨는 “무대에 서면 희열이 느껴진다”고 했다. “한 번 박수를 받고 나면 그게 얼마나 기분이 좋은데요. 물고기가 입질하듯이. 그래서 코미디언이 되는 걸 포기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정현씨는 ‘개콘’ 서수민 PD와 눈이 마주친 순간 얼어붙어 망쳤다고 했다. 힘이 빠진 모습으로 계속 자책하던 그는 “시간을 돌리고 싶다”고 했다. 비교적 시험을 잘 본 것 같다는 정훈씨는 “긴장 때문에 한 달 동안 하루 2시간씩밖에 못 잤다”고 했다. 정현씨가 정훈씨의 손을 꼭 잡고 “얘가 자기만 붙으면 안 하겠다고 했어요. 이거 꼭 써 주세요”한다. 정훈씨가 별 말이 없자 “너 변했다”고 말하지만 반대로 자신이 붙으면 할 거란다. “내년에 합격하도록 끌어 주면 되죠.” 같은 길을 걸으며 만난 두 친구는 공동운명체처럼 느껴져 서로가 경쟁 상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코미디극단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혜선(28)씨도 나이 때문에 절실하다고 했다. 근성 있어 보이는 그는 발로 차고 구르는 액션에 코믹 연기까지 선보여 모처럼 심사위원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개인기로 정종철의 마빡이를 차용한 발빡이를 보여 준 그는 발로 이마를 차는 고난이도 액션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여자 달인이네.” 심사위원석이 술렁거렸다. 혜선씨 스스로도 가장 좋아하는 선배가 김병만이란다. “발 싸대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기 위해서 하루에 100개씩 5개월 동안 연습했어요.” 혜선씨는 댄서 출신으로 6개월 과정의 액션스쿨을 수료한 그야말로 몸 쓰는 데 일가견이 있는 이지만 시험을 위해 정말 피나는 노력을 했다고 했다.

14일

#나는 코미디언입니다

최종합격자 15명이 발표됐다. 시험을 앞두고 한 달간 잠을 설쳤다는 김정훈씨와 몇 달간 몸을 단련했다는 김혜선씨를 비롯해 진지하게 노력한 이들이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했다. 이들은 이제 당당한 KBS 26기 코미디언이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 심사위원 눈길 잡으려면

웃기는 데에는 왕도가 없지만 모든 시험에는 요령이라는 게 있다. 고로 코미디언 시험도 시험이니 잘 볼 수 있는 팁이 있다. 물론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처럼 재능이 뛰어나면 어떻게든 도드라지게 마련. 그렇지만 개그콘서트에서 ‘까다로운 변 선생’으로 인기를 모았던 변기수도 지상파 코미디언 시험에 무려 13번 낙방한 끝에 꿈을 이뤘다. 이번 공채 시험 심사에 참여한 PD들과 현직 코미디언들에게 ‘시험 잘 보는 법’에 대해 조언을 구해봤다.

▲예능국 박중민 EP=개그에 기승전결이 있어야 한다. 욕을 하는 등 비방용 개그는 절대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없다. 뛰어난 장기를 보여주는 것도 효과 만점이다. 정종철은 시험에서 게임기 소리를 똑같이 흉내 내 심사위원들의 관심을 받았다.

▲개그콘서트 서수민 PD=자기만 웃긴 것 말고 남을 웃길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 주제를 잘 잡아야 한다. 방송에서 쓸 수 있겠다 싶으면 일단 더 눈길이 간다. 2차에는 시간이 짧은 만큼 앞부분에서 센 웃음을 보여주고, 3차는 다양한 장기로 끼를 보여야 한다. 장도연은 최종에서 간장 한 병을 다 마셔서 열정을 어필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모두들 이렇게 하면 곤란하다.

▲개그스타 문성훈 PD=자신감 있는 태도에 더 눈길이 간다. 위축되거나 긴장한 모습을 보이면 보는 사람도 흥미가 떨어진다. 머뭇거리지 말고 당당하게 하라. 이번 시험에 ‘개그스타’에서 활동하는 지원자들도 많았고 SBS 출신도 보였지만 중요한 건 시험장에서 얼마나 웃기느냐다.

▲코미디언 김준호=뚱뚱한 걸로 승부하려면 김준현보다 더 해야 하고, 고학력으로 웃기려면 박지선보다 뛰어나야 한다. 결국 자신만의 독창적인 뭔가를 끄집어 내야 눈길을 끌 수 있다. 현재 활동하고 있는 코미디언 캐릭터를 베끼면 오히려 식상하다.

▲코미디언 신종령=예전에는 각설이 복장을 한 지원자들이 많았다. 과한 분장보다는 평범함 속에서 의외성을 보여주는 게 더 낫다. 연기력은 기본이다. 아이디어는 작가나 PD의 조언을 받을 수 있지만 연기가 뒷받침이 안되면 무대에 설 수가 없다.

채지은기자 c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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