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 맘 때 일본 교토에서의 내 일상 속 두 풍경이 선명하다. 틈틈이 일본어를 열심히 배웠고, 규슈에서 형성된 벚꽃 전선의 북상 소식을 매일 확인하면서 들뜬 마음으로 본고장 벚꽃놀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토 YWCA의 외국인을 위한 무료 일본어 프로그램은 참 실용적인 내용이었다. 쓰레기 분리수거, 새 이웃과 인사하는 법 등에서부터 병원 우체국 등 공공기관 이용법, 화재 등 위급시의 구조요청 요령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요긴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 중 지진 대처 연습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지진에 대비해 가구는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 가스 전기는 어떻게 조처하는지, 유사시 어떻게 몸을 피해야 하는지 배웠다. 비상용품으로 무엇이 필요하며 어떻게 챙겨야 하는지 토론했고, 자기 동네의 가장 가까운 대피처가 어디인지도 일일이 확인했다. 진도(震度)에 따라 세분화된 행동 강령에 준해 좀 유치한 상황극까지 만들어 서툰 일본어로 하하 호호 몇 번씩 반복 연습을 했다.
다행히, 모의훈련은 빈약한 일본어 실력 향상에 도움을 준 재미있는 수업이었을 뿐 실제로 써먹을 기회는 없었다. 호들갑스런 교육을 나는 의심했고, 왜 일본에는 도에 넘치는 매뉴얼과 에티켓이 여전히 그렇게 중요한가, 오만하게 질문해서 자원봉사자 선생님을 곤혹스럽게도 했다.
그 사이, 매화가 지고 벚꽃이 피었다. 교토의 봄은 눈부셨다. 피는 건 한참이지만 지는 건 잠깐이라지. 특강이 끝나갈 무렵 벚꽃 전선도 북쪽으로 올라갔다. 2ㆍ3주쯤 뒤엔가 아오모리(靑森)와 후쿠시마(福島)에서 뒤늦은 꽃놀이 소식이 들려왔다.
올해 봄소식은 대체 어디쯤 오고 있는 것일까. 도후쿠(東北) 지방을 휩쓸고 간 것은 예기치 못한 쓰나미 전선이었다. 삼나무 푸른 숲과 맛있는 사과, 아름다운 물빛의 고장. 지금쯤 윤슬의 봄 바다가 찬란해야 할 그곳에 쓰나미라니, 방사능이라니. 후쿠시마. ‘복 받은 섬’이라는 그 이름조차 슬프다.
나를 울컥하게 한 것은 영화보다 더 참혹한 현장이 아니라 피해 당사자들의 침착한 행동과 의연한 표정이었다. 어떤 재난 대비 매뉴얼도 무색했던 자연의 힘 앞에 그들은 조용히 울고, 조용히 기다렸다. 그 평정이 더 아프게 가슴에 와 꽂혔다.
마침 서울에 온 ‘화(和):일본 현대 디자인과 조화의 정신’ 전의 도후쿠 지방 공예품 앞에 발길이 오래 머물렀다. 너도밤나무를 이용한 아오모리 산 램프와 아키타(秋田)의 삼나무 도시락 통, 이와테(岩手)의 칠그릇 등, 단정하고 쓸모 있는 디자인 속의 조화가 무심하게 아름답다. 귀엽고 결이 고운, 절제된 선과 형태 속에 바깥으로 열려 있으면서도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 유연함, 아마도 그것이 ‘화(和)’의 정신이 아닐까. 후쿠시마에서 왔다는 옻칠한 가정용 불단(廚子) 앞에서 적지 않은 지인들의 안부를 물었다. 이 엄청난 자연의 재앙 앞에 인간으로서 우리는, 나는 대체 뭘 할 수 있는 지 생각하면서.
후쿠시마 홈페이지에서 우연히 발견한 ‘꿈의 향기’(夢の香)가 반갑다. 일본 술의 재료로 쓰이는 후쿠시마 특산의 쌀 이름으로, 추위와 병해에 강하고 쉽게 쓰러지지 않는 오뚝이 같은 품종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오뚝이는 후쿠시마의 마스코트다. ‘희망의 바깥은 없다’(도종환)던가. 봄은, 안으로 무르익으면서 더 단단해진 그들의 마음속으로부터 기어이 올 것이다. 나는 응원한다. 그들처럼 열렬한 침묵으로. 간바레!
성혜영 박물관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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