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연 중심 향판의 병폐인가 견제 세력의 파워게임인가
지난달 말 광주에서 법조계를 떠들썩하게 한 사건이 터졌다. 이른바 선재성(48) 부장판사 파문. 당시 광주지법 파산부에서 기업 법정관리 업무를 전담한 선 판사가 친형과 친구인 K변호사, 퇴직한 자신의 운전기사 등을 법정관리인과 감사 등으로 선임한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당초 부적절한 업무 논란에 그쳤던 사건은 선 판사와 K변호사의 유착 의혹으로까지 번지면서 검찰이 수사에 나서는 등 파장이 컸다. '그게 뭐가 문제냐'식으로 버티던 선 판사는 결국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고 재판에서 배제돼 지난 9일 사법연수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그가 떠난 뒤 사건의 배경을 놓고 법조계 안팎에선 '향판(鄕判ㆍ지역법관제)의 전횡' 이라는 일반적 해석 외에 '법원 내 보수세력의 진보색(色) 지우기' '법정관리기업 옛 경영진들의 역공' 등 여러 말들이 나돌고 있다. 선 판사 파문의 진실은 무엇일까.
"두 분 사이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광주의 한 40대 변호사는 선 판사의 부적절한 법정관리 업무 파문에 대해 묻자 "내가 답변하기는 부적절하다"며 구체적인 답변을 피하더니 이내 선 판사와 K변호사의 '특별한 관계'얘기를 꺼냈다. 그는 "통상 재판과정 등에서 판사가 친분 있는 변호사에게 각종 편의를 봐주는 경우가 있는데, 선 판사의 경우 고교 동창인 K변호사에게 제공한 편의는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넘었다"며 "그 정도가 너무 심해 이번 사건이 터졌다"고 말했다.
지난해 선 판사가 광주지법 파산부 수석부장판사를 맡으면서부터 지역 법조계에선 "K변호사가 선 판사 덕에 사건 수임이 늘었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고 한다. 실제 이번 사건이 불거진 후 변호사들 사이에선 "선 판사의 친구(K변호사) 챙기기가 심했다. 친구를 법정관리기업 감사로 앉히더니 결국 터질 게 터졌다"는 말이 돌았다.
A변호사는 "선 판사가 K변호사에게 알게 모르게 편의를 봐줄 수는 있었을 것"이라며 "그런 만큼 K변호사가 (소문 안 나게) 처신을 잘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결국 파문의 발단이 학연(광주일고)을 중심으로 한 향판의 전횡이라는 이야기였다. 선 판사는 1990년 판사로 임용된 뒤 19년을 광주ㆍ전남지역에서 근무한 대표적 향판이다.
그러나 이 같은 해석을 일정부분 인정하면서도 다른 측면을 주목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선 판사의 부적절한 처신은 비판 받아 마땅하지만 파문 확산 과정은 석연찮은 구석이 많다는 것이다.
"성격이 너무 강해 역풍을 맞았다"
B변호사는 "일부 법정관리기업 옛 경영진들의 '플레이'에 선 판사가 당한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진보성향의 선 판사가 옛 경영진들의 재산 빼돌리기 등 각종 탈법행위를 막기 위해 측근 등을 통해 견제를 심하게 하자, 옛 경영진들이 눈엣가시 같은 선 판사를 찍어내려고 언론 등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법정관리기업 옛 경영진을 상대로 한 채권추심업무 대리인 선임과정에서 선 판사와 K변호사의 유착 의혹을 주장하는 익명의 진정서가 검찰에 접수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C변호사는 "지난해 선 판사가 법정관리를 신청한 모 기업 회장이 재산을 빼돌린 사실을 말하며 법정관리 중에도 옛 경영진이 비슷한 장난을 치지 않을까 우려했었다"며 "깐깐하기로 소문난 K변호사를 이 기업의 감사로 보낸 것도 노회한 옛 경영진들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사의 회계조사위원이었던 한 회계사도 "선 판사가 K변호사를 감사로 선임하자 회사 쪽(옛 경영진)에서 무척 언짢아했다"고 말했다.
"보수 판사들과 보수 언론의 짬짜미"
선 판사 찍어내기 시도가 법원 내부에서도 이뤄졌다는 주장도 있다. 선 판사 파문을 키워서 사법부에서 진보 색채를 쓸어내려는 보수 판사들의 기득권 되찾기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판사는 이에 대해 "민감한 부분이다. 지금은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법원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진보 판사 손보기라는 해석에 대한 법원 밖의 시각은 좀더 사실적이다. 판사 출신의 D변호사는 "법원 내 보수진영이 모종의 의도를 가지고 선 판사 때리기에 나선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며 "하필 이용훈 대법원장의 임기 만료(9월)를 앞두고 보수언론들이 뭇매치기 식 보도를 하는 것도 순수하게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법원 내 보수세력이 보수언론과 짜고 사법부를 흔들어 헤게모니를 잡으려 한다는 견해다. 사실 지난달 15일 이번 파문이 처음 불거졌을 때만해도 소극적인 보도태도를 보였던 보수언론들은 이달 3일부터 작심한 듯 일제히 선 판사 때리기에 나서 일각에선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 흘러나왔다.
이와 관련, 중견 변호사 E씨는 흥미로운 전망을 내놓았다. "분명 선 판사가 잘못하거나 오해를 살만한 부분이 있지만 너무 나쁜 판사로 매도 당한 면도 있다. 검찰이 수사한다고 하지만 쉽지 않을 거다. 그는 성격상 변호사에게 돈을 받고 그런 판사는 아니다. 결국 이번 파문의 관전포인트이자 종착점은 대법원장이 누가 되느냐가 될 것이다. 두고 봐라."
광주=안경호 기자 khan@hk.co.kr
■ 도마 오른 향판 제도…지역 향한 애착과 유착 사이 '달콤한 毒'
"지역에 대한 '애착'을 넘어서 '유착'이 됐다."
일선 검찰청 중견급인 A검사는 향판(鄕判)으로 불리는 지역법관의 문제점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는 몇 년 전 지방근무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향판과 향판 출신 변호사들의 행동이 도를 넘었다. 적어도 형사재판에선 향판을 배제해야 한다"고도 했다.
A검사가 전하는 경험담은 이렇다. 그는 지방 검찰청에서 집행유예 기간에 범죄를 저지른 B씨를 상습폭행 혐의로 기소한 적이 있다. 상습폭행 혐의는 벌금형이 없어 실형 선고가 예상됐던 사건이다. 그런데 사건을 맡은 이 지역의 대표적 향판인 C판사가 벌금형 선고가 가능한 일반 상해죄로 공소장을 변경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왔다. 알고 보니 이 지역 향판 출신의 변호사가 사건의 변호를 맡으면서 C판사를 통해 공소장 변경 의사를 검찰에 타진해온 것이었다.
A검사는 당연히 공소장 변경 요구를 거절했는데, 이번에는 재판 기일이 잡히지 않았다. A검사는 "B씨의 집행유예 기간이 끝난 뒤 선고를 하기 위해 C판사가 고의로 재판을 연기시킨 것"이라고 말했다. 집행유예 기간이 끝난 뒤 선고를 할 경우엔 또 한번 집행유예 선고가 가능하다.
광주지법 선재성 부장판사 파문을 계기로 또 다시 향판제가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향판제는 수십년 전부터 이어져온 법원 내부의 인사 관행이다. 지방 근무를 자청하는 향판의 존재는 대다수 법관이 지방보다는 서울 근무를 희망하는 법원의 근원적 인사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는 효자 노릇을 해왔다. 한 고위 법관은 "어떻게 보면 향판은 스스로 낮은 곳에 임한다는 점에서 희생한다는 측면이 있다"며 "이들로 인해 법원 인사 정책이 수월해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용훈 대법원장도 이 같은 현실을 인정해 2004년 취임하면서 아예 향판제를 공식화했다. 당시 대법원은 "전보인사 축소로 법관의 생활안정을 도모하고 지역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재판을 하기 위해서"라고 도입 취지를 밝혔다.
현재 전체 판사 2,561명 가운데 향판(고법 부장판사 제외)은 모두 333명으로 13%를 차지하고 있다.
실제로 향판제는 장점이 적지 않다. 먼저 서울 근무를 꿈꾸며 길어야 1~2년 지방에 머무는 '뜨내기 법관'들은 해당 지역에 대한 애착을 가지기 어려운 반면, 지역 사정에 밝은 향판들은 지역민의 고충과 애로를 더 잘 이해한다는 평가를 받는다. 향판은 또 서울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지역 법조계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역할도 한다. 부산지역 향판과 지역 변호사들이 모여 판례를 연구하는 '부산판례연구회'는 향판이 중심이 돼 지역 법조계 발전을 이룬 좋은 사례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향판이 지역 사회와 학연, 지연, 혈연으로 엮이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재판의 공정성과 신뢰의 위기를 불러오고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고교 동기 변호사와 형, 심지어 운전기사를 법정관리 회사 관리인에 임명함으로써 물의를 일으킨 광주지법 선 부장판사 사건은 향판이 지역사회 무소불위의 권력이 됐음을 입증한 예다.
지방근무 당시 지역 유지를 기소한 적이 있는 D검사의 경험담도 이런 우려를 뒷받침한다. D검사는 "피고인은 향판 출신 재판장의 고향 후배였고, 변호사도 같은 향판 출신이어서 서로 교류가 잦았다"며 "재판 전부터 사건 이야기를 들었던 판사는 이미 무죄 심증을 굳힌 상태라, 이를 뒤집기는 역부족이었다"고 말했다.
더 큰 문제는 향판을 견제할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D검사에 따르면 또 다른 향판 출신 부장판사가 항소심에서 1심 판결을 바로 잡아유죄를 선고했는데 지역사회에서 이 부장판사에 대한 근거없는 악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D검사는 "좁은 지역일수록 이리저리 얽히는 인연이 많아 향판 입장에서도 처신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면 선 부장판사 사건과 같은 향판제의 폐단은 어느 정도 예견됐던 일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은 아직 머뭇거리고 있는 모습이다. 향판제로 얻는 달콤한 과실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적지 않다. 대법원 관계자는 "향판제의 장점도 분명히 있는데 단점만 부각돼 아쉽다"며 "일단 사람의 문제인지 제도의 문제인지 따져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권지윤기자 legend8169@hk.co.kr
정재호기자 next88@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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