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어찌 이 해의 의미를 모르는 한국 사람이 있을까만은 나에게는 유독 각별한 1950년이었다. 그 해 최인규 감독에게 연출수업을 받은 4년여의 조감독 생활을 마치고 부친을 설득해 제작비를 도움 받아 김성민 각본, 신현호 촬영으로 내 첫 영화 '유혹의 거리'가 순조롭게 진행됐다.
배우 조형기의 아버지 조항, 그리고 구봉서 전미 김웅 염석주씨 등 그 때 한참 잘 나가는 배우들은 거의 모두 출연했고, 양주남 감독이 편집을 하여 2개월여 만에 거의 모든 작업을 마무리 했다. 그러나 녹음을 앞두고 6ㆍ25전쟁이 발발하고 만다. 설렘과 두려움 그리고 기대감 속에 완성한 데뷔작 유혹의 거리를 서둘러 집 지하에 보호하고자 했다.
그러나 우리 집은 폭격에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졌고, 집 지하에 보관했던 원판 네가 필름은 포탄으로 인해 집이 전소되면서 소실되고 말았다. 청년 정창화의 정신과 노동과 정체성의 산물로 선택된 일종의 농촌계몽영화였던 첫 작품 유혹의 거리는 그렇게 태어나지도 못한 채 사산되고 말았으니 지금 생각해봐도 애석하기 그지없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쟁 중 가슴에 묻은 첫 작품에 대해 망연자실할 틈도 없이 일본대학에서 영화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제 내가 가야 할 길은 부산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를 타는 길뿐이었다.
도보로 부산을 향해 남하하는 피난길은 하룻밤 민가에서 숨어서 자면 벌써 국군은 밀려가고 북한군이 점령하는 식이어서 숨 막히게 위험한, 목숨을 건 숨바꼭질과 같은 양상이었다. 그러던 중 충남 성환에서 무장을 한, 좌익단체 민청대원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간첩으로 몰려 근처의 쌀 창고로 끌려 들어갔다. 쌀 창고 안에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참혹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재판도 없이 끔찍하게 처형된 민간인들의 시체가 10여구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나 또한 꼼짝없이 총살을 당하려는 순간 두 눈을 질끈 감으니 파란 많았던 인생이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혼비백산 반쯤 혼이 나간 상태에서 가족과 친구들에게 잘못한 순간들이 빛의 속도로 명멸했다. 혼미함 속에서 그 순간들을 후회하며 '다시 살아난다면 잘 해 줘야지'하는 생각뿐이었다. 아무 생각이 없는 것과 셀 수 없는 생각들이 혼재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 극도의 두려움이 모순적인 상황을 공존하게 한 듯했다.
몽롱하게 의식을 잃어가던 내 귀에 어딘지 익숙한 목소리가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게 들려왔다. 내 앞에 의용군 1 소대를 인솔하고 전선으로 가던 대장이 나타난 것이다. 어쩐지 그 대장의 목소리가 귀에 익어 겨우 의식을 모아 눈을 들어보니 중학교 때 경제를 가르쳐주셨던 고재경 선생님이셨다. 두려움에 가득 차 엉겁결에 "고재경 선생님"하고 외치니 놀란 선생님이 "웬일이냐"하시면서 다가오셨다. 목이 멨지만 본능적으로 살 수 있다는 희망에 매달려 젖 먹던 힘까지 목소리에 실어 내질렀다.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려 총살당할 위기입니다"라고 했더니 선생님께서는 민청대원을 향해 "너희가 인민재판도 없이 처형을 할 수가 있느냐? 얘는 내 제자인데 간첩을 할 아이가 아니다. 내가 데려 가겠다"며 소리를 치셨다.
선생님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지만 의용군 참전을 권하는 선생님의 뜻을 따를 수는 없었다. 선생님께는 어머니를 찾아 집에 보내드리고 참전하겠다고 간청을 했다. 선생님은 의용군 참전을 원하지 않는 내 의중을 알고 계셨기에, 겉으로는 짐짓 모르는 척하며 보내주셨고 그렇게 해서 나는 천신만고 끝에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었다. 이때의 사연은 훗날 김성민 감독이 일본 주간지 주간 요미우리에 자료를 제공해 기사로 소개된다.
전쟁은 이미 드라마보다 더욱 드라마틱할 수밖에 없다 보니, 뜻밖의 사건과 인연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어 예측을 불허했다. 그 예측불허의 전시상황은 계속됐다.
일본 행 배를 타기 위해 부산을 향해 다시 남하를 계속하던 중 나는 우연히 대구에서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에 입대하게 됐다. 대장 윤봉의 소령 휘하에서 나를 위시한 여러 촬영기사들이 전선 뉴스를 찍었다. 김종환 김강위 김덕진 촬영기사들이 최전방에서 '정의의 진격'이라는 기록영화 촬영에 참여하고 있었고, 나는 강원 정선군의 창녕지구 9사단으로 파견되었다.
강원 골짜기에서 전투가 한창인 어느 지독하게 추운 겨울 밤에 파견지에 도착 했다. 선임하사 이유동 촬영감독이 어디서 구해왔는지 소고기 국과 따뜻한 밥을 접대하며 반갑게 환대해줬다. 따뜻한 식사와 환대로 몸을 녹이고 휴식을 취한 후 "내일은 작전참모본부에 가서 거기 상황을 기록하도록 하자"며 9사단 정훈 부장 김 대위와 취침에 들어갔다.
새벽 4시育潔駭? "포위당했다"는 단말마(斷末魔)의 외침에 황급히 눈을 뜨고 나가 보니 하얀 눈이 쌓인 능선너머 새까맣게 개미떼 같은 중공군이 꽹과리를 치고 피리를 불고 함성을 지르면서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미 사단장과 군사고문관, 작전참모부 장교들은 보이지 않았고 사단은 완전히 와해돼 버린 상태였다.
남아있는 사병들은 작전장교도 아닌 정훈대 장교의 지시만 기다리고 있는 난감한 상황. 마침 대전차포를 싣고 지나가던 수색대장이 정훈부장과 내게 "타십시오"라고 했다. "우리보다는 여기 부상병이 많으니까 부상병을 실어야 한다"고 수색대장을 설득하여 부상병들을 트럭에다가 잔뜩 태우고 정훈부장과 난 간신히 포신에 매달려 후퇴했다.
천행이라며 한숨을 돌리는데 돌연 트럭에서 연기가 났다. 그 때는 부동액이 없어 밤에 물을 빼놨다가 아침에 물을 붓던 시절인데, 중공군 기습에 혼을 빼놓았던지 당황한 운전병이 아침에 물 붓기를 잊어 엔진이 타버린 것이다. 눈물을 머금고 어찌할 수 없이 부상병들을 뒤로 한 채 트럭에서 내려 다시 퇴각해야 했던 기억은 지금도 마음을 아프게 한다.
식량이라고는 군복 바지 양쪽 옆 건빵주머니에 있던 마른 두 봉의 건빵과 물이 전부였던지라 건빵과 물로 배를 채우며 원대 복귀 길에 올랐다. 충주를 향해 3일 정도를 도보로 넘어가는 길이었다. 원대 복귀 중 내가 만난 국민방위군은 강제 징집당한 어린 청소년들이 대다수였다. 1951년 1월 후퇴작전 때 고급장교들이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의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고 착복함으로써 아사자(餓死者)와 동사자(凍死者)가 속출하였는데, 그 사망자 수만도 9만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굶주리며 죽어가던 국민방위군을 맞닥뜨린 것이다. 국민방위군이 지나가던 그 충주 외곽지대에 피골이 상접한 할머니가 인절미를 팔려고 나왔다. 할머니의 떡판은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는 굶주린 국민방위군에게 처참하게 약탈당했다.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방위군 소위였던 소대장을 나무라보았지만 내 힘은 역부족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45구경 권총을 뽑아 들고 방위군 소대장에게 들이대며 "야! 할머니에게 네가 대신 무릎 꿇고 사과해!" 소리쳤다.
소대장이 대꾸 없이 할머니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하니 옆에 있던 방위군 몇 명도 합세하여 할머니에게 무릎을 꿇었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후에 방위군 사령관이 총살까지 당한 큰 사건이었다. 뒤에 언급하게 될 유현목 감독도 이 때 국민방위군으로 강제징집 당했다가 방위권이 해체되면서 내 조감독이 되는 인연을 맺었다. 전쟁이라는 모순투성이 기반 속에서 만들어지고 해체돼 버린 국민방위군이라는 존재감은 내게 남다르다고 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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