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후기 야운(野雲)스님은 출가 수행인이 스스로 일깨우고 경계해야 할 내용의 글을 지어서 ‘자경문(自警文)’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자경문은 보조국사 지눌(知訥)스님이 지은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과 신라의 원효(元曉)스님이 지은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과 합본하여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이라고 한다. 초발심자경문은 지금까지 갓 출가한 초심 승려가 지켜야 할 생활규범과 수행의 덕목을 적은 기본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그 문체가 간결하면서도 문장이 무척이나 빼어나기 때문에 처음 한문 불서(佛書)를 접하는 사람들도 완전히 매료되어 버리곤 한다. 소리 내어 읽다 보면 그야말로 한 문장 한 문장이 보석 같이 아름답고, 입안에는 단맛이 감돌곤 한다.
들 야(野)에 구름 운(雲)자를 써서 들녘의 구름이라는 소탈한 이름을 가진 야운 스님은 당신의 글 첫 머리를 “주인공(主人公)아, 나의 말을 들어보아라.”라고 시작하신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주인공으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마는 스님의 글을 읽는 순간 모두가 바로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그 주인공들에게 따끔한 한마디 훈계의 말씀으로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도를 얻어 진리의 문에 들어갔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아직도 고통스런 세상가운데 빠져서 헤매고 있는가?”
야운 스님의 눈에는 도를 얻어 진리의 문에 들어간 사람도, 세상의 풍파에 휩쓸려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도 모두가 같은 주인공이다. 다만 그 주인공이 주인공답게 살고 있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주인공답게 살지 못하고 있는 주인공들에게 주인공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자상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주인공이 되고 싶어들 한다.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는 중심에 자리하는 빛나고 멋진 삶을 꿈꾸곤 한다. 그러나 그런 멋진 주연의 자리는 아무나 차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설사 한 번쯤 주인공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를 계속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상황과 시간의 변화는 더욱 급격해지고 사람들은 너무나도 빨리 실증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가며 세상을 더 많이 알아가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인공의 자리를 포기하곤 한다. 그저 이름 없는 존재 일지라도 적절한 자신의 위치와 역할만 주어진다면 만족할 수 있는 소박한 자연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 보면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들의 요구와 바람을 충족시키며 살아가는지도 허깨비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주인공은 스스로의 의지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겁고 만족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다.
세상 사람들은 보다 더 윤택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해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추구하는 주인공의 자리는 남보다 더 윤택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더 자유롭거나 행복하지는 않은 것 같다. 사람들의 시선과 관심이 집중된 자리가 결코 편하고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야운 스님이 부르는 주인공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주인공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삶에 주인 노릇을 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길가에 핀 한 송이 여린 들꽃도 주인공이고, 이름 없는 한줄기 잡초도 주인공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는 곳이라도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정말 주인공이다. 지금 이 글을 읽으며 가슴 뛰는 자신을 발견하는 당신이 주인공이다.
주경 서산 부석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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