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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도호쿠 대지진/ "쓰나미 또 온다" 대피 사이렌에 복구 멈추고 육교 위로 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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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도호쿠 대지진/ "쓰나미 또 온다" 대피 사이렌에 복구 멈추고 육교 위로 질주

입력
2011.03.12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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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은 얄밉게도 따사로웠다. 어김없이 떠오른 태양은 재앙의 땅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일본 도호쿠 대지진 발생 4일째인 14일 오전 9시40분쯤, 미야기(宮城)현 센다이(仙台)시 해안에 맞닿은 와카바야시(若林)구에 들어갔다.

3일 전 비극의 날에 시신 300여 구가 떠오른 곳이다. 센다이시는 가옥 2,700여 채가 침수됐다. 미야기현 주변 해안에선 이날 2,000구가 넘는 시신이 발견됐다. 미야기현 전체 추정 사망자가 1만여 명이라는 소식도 들렸다.

와카바야시 마을은 심술궂은 아이가 휘저어놓은 장난감 상자 같았다. 찌그러진 자동차와 뒤집힌 배, 옷가지와 세간, 건물 잔해들이 알아보기도 힘들만큼 뒤엉켜 있었다. 그 안에 스며있었을 따뜻한 삶을 떠올리자니, 거대한 쓰레기장이란 표현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군데군데 쓰러진 집에서는 그래도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폐허 속에서도 삶은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슬프도록 애처로운 그 광경에 재난의 현장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현실감이 떨어진 기자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대자연의 힘에 짓눌린 사람들은 간신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해일에 쓸려온 쓰레기 더미들을 포크레인이 양쪽으로 밀며 길을 만들고 있었고, 군인과 소방대원은 분주히 도로를 오갔다. 그나마 집에 남은 짐이라도 챙기러 들어온 주민들, 남편이 집안에 쌓인 흙더미를 삽으로 퍼내면 부인이 세간을 마당으로 꺼내 정리하는 부부도 있었다. 건설중장비의 굉음이 복구의 시작을 알렸다.

그러나 대자연의 심통은 집요했다. 오전 10시40분 마을 복판의 소방차가 “삐이잉~” 요란한 사이렌을 울리더니 “지금 해일이 오고 있으니 모두 밖으로 나오시오”라는 방송이 반복됐다. 쓰나미 경보였다.

육교 위에서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던 기자는 순식간에 재앙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바닷가에 있던 복구인력 10여명과 소방대원, 집안 곳곳에 있던 주민들이 육교 위로 질주해 왔다. 한 노부부는 이불과 옷가지 몇 개를 끌어안은 채 숨을 헐떡이며 뛰어 올라왔고, 한 어린이는 도시락 2개를 품고 가족의 손에 이끌려 왔다. 진흙이 묻은 장화에 장갑을 낀 인부들까지, 길이 40m의 육교에 40여명이 들어찼다. 육교에서 북쪽으로 100m가량 떨어진 다리 위에도, 남서쪽 100m 지점의 중학교 건물 옥상에도 각각 30여명과 1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 다시 넋 나간 표정으로 바다를 응시했다.

육교에서 바다까지의 거리는 2㎞. 높이 5m 남짓한 육교는 지난 11일 닥친 높이 5m의 해일에도 잘 견딘 듯했다. 34개의 육교 계단 중 14개까지만 진흙이 남아있을 뿐 파손된 흔적은 없었다. 육교로 피신한 주민들은 이날 오전 남쪽 이바라키(茨城)현에서 발생한 6.2 규모 여진의 여파라고 했다.

오전 10시58분, “앞바다에 수위 변화가 관측됐으니 높은 곳으로 대피하라”는 경고방송이 다시 흘러나왔다. 이미 거리엔 아무도 없었다. 3분 뒤 “쓰나미가 관측됐다”는 방송과 더불어 하늘은 흐려지고 남쪽에서 강풍이 불었다. 육교는 흔들리고 폐허 더미에 흩어져있던 비닐과 나무합판 등이 땅으로부터 솟아올랐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오전 11시10분, 바다 쪽에서 작업하던 소방차와 앰뷸런스 20여대가 대원과 주민들을 태우고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리며 마을 쪽으로 왔다. 10분 후 자위대 헬기가 일대를 낮게 날면서 거듭 방송을 했다. “높은 곳으로 피난하십시오. 지금 쓰나미가 왔습니다.”

쓰나미를 예고하는 거센 바람과 끊이지 않고 흘러나오는 헬기 방송에 극도의 공포감이 밀려왔다. 육교 난간을 잡았다 놓았다 하기를 수십 번이었다. 더 높은 곳을 찾을 수도, 얼어붙은 듯한 발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사태가 진정된 건 첫 해일 경보가 울린 지 1시간10분 후인 오전 11시50분이었다. 군인들이 다시 중장비에 오르는 걸 확인한 주민들도 긴장을 풀었다. “후쿠시마(福島)현 앞바다에만 3m의 해일이 일었다”는 소식에 그들은 안심한 듯 지상으로 내려갔다.

다시 바다 쪽으로 발을 옮겼다. 인간이 그어놓은 경계와 정해놓은 자리는 무의미했다. 전봇대는 땅에 누워 있었고, 자동차는 집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바다에 있어야 할 배는 아스팔트 위에 거꾸로 엎어져 있었고, 그 위에 다시 자동차가 올라타고 있었다. 큰 나무에는 이불이 걸려있고, 집 안 거실에는 자전거와 변기가 함께 나뒹굴었다.

사방이 물구덩이고 지붕 위까지 흙이 올라앉아 있었다. 세간은 어디랄 것도 없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바다 쪽으로 갈수록 집들은 20~30m 간격으로 한두 채씩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논인가 싶었던 집과 집 사이 진흙밭은 당초 목조건물 터였다고 했다. 지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목조로 집을 지었건만 무정한 해일은 아예 송두리째 쓸어가 버렸다. 높이 5m의 언덕엔 지붕이 통째로 걸쳐있었다.

그렇게 수천의 집과 인명을 집어삼킨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잔잔했다. 그 뻔뻔함에 치가 떨려 다시 마을로 발걸음을 돌렸다.

군인들이 시신을 운반하고 있었다. 불이 난 집에서 시신 한 구를 수거해 길에 놓여 있는 다른 시신 3구 옆에 놓았다. 건너편 집은 아직도 검은 연기를 피워올리며 불타고 있었다. 걷는데 발에 뭔가 자꾸 밟혔다. 바다에서 몇 ㎞ 떨어진 아스팔트 위에 해삼 수십 마리가 흙을 뒤집어 쓴 채 죽어있었다.

주민 쯔보타 하루오(62)씨는 사진첩을 들고 넋 나간 듯 헤매고 있었다. 바다에서 1㎞ 떨어진 곳에 집이 있다는 그는 부인과 딸을 해일 5분 전에 대피시켜 화는 면했다. 하지만 조카가 사라졌다고 했다. 그가 들고 있는 사진첩 속의 조카는 웃고 있었다.

와카바야시(센다이)=남보라 기자 rarar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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