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드류 포터 지음ㆍ김이선 옮김
21세기북스 발행ㆍ292쪽ㆍ1만2,500원
현란한 수식도 없고 강렬한 표현 하나 등장하지 않는, 단순하고 간결한 문장인 것은 분명한데 명치 끝은 무지근히 저릿하다. 1인칭의 속삭이는 듯한 글의 표면이 잔물결의 평온한 수면이라면 그 전언에 실린 울림은 심해의 소용돌이처럼 강렬하다고 할까.
난해한 현대 물리학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은 정말 난해한 현대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상한 이론'에서 제목을 따온 것이긴 하지만 10편의 단편에 물리학 개념은 한 자도 등장하지 않으니 안심하길. 다만 표제작에서 물리학자가 한 명 등장하나 불가해하고 불가측한 삶을 빗대는 직함일 뿐이다. 빛과>
이를 테면 이런 것. 현대 물리학이 얘기하는 극미의 양자 세계는 단단한 뉴튼적 거시 물리세계를 근원에서 흔들었다. 빛 입자의 경로를 예측할 수 없고, 측정 순간 그 경로가 바뀌고 만다는 발견이었다. 삶에 비유하자면 누구도 자신의 행로를 알지 못하고, 알려는 순간 그 길은 미세하게 흔들린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과 기억과 마음 역시도.
현대 물리학이 발견한 불확실성을 '일상의 배후에 놓인 불안'으로 감지한 것은 문학이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은 그 연장선의 단편 소설집. 책은 2008년 나온 앤드류 포터(39)의 첫 소설집으로 단편소설에 수여되는 플래너리오코너상을 받았고, 10여개 국에 번역됐다. 작가는 미국 주변부의 불안감을 포착한 현대 단편문학의 거장 레이먼드 카버와 존 치버의 작품을 선호한다고 밝힌 그들의 계승자다. 작품마다 1인칭 화자가 이야기를 이끌며 때로 살갑고, 때로 비밀스럽게 과거의 기억이나 타인의 삶을 풀어낸다는 점이 특징이다. 빛과>
첫 단편'구멍'은 그 일상의 불안과 외로움, 어긋남을 우리가 언제 헛발 짚고 빠질지 모르는 '검은 풀죽 냄새 나는 맨홀'로 드러내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 친구 탈은 동네 맨홀에 봉지를 빠뜨려 그 봉지를 줍기 위해 맨홀로 들어갔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한다. 유일한 현장 목격자는 화자인 나. 탈의 형은 나에게 그날의 일을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한다. 악몽에 시달리는 나 역시도 탈 대신에 자신이 구멍에 들어가는 꿈의 진실을 그들에게 말하지 못한다. 표제작에선 충실한 남자 친구를 두고서도 아버지뻘의 물리학자에게 끌렸던 헤더는 그의 부음 소식에 조용히 뒤뜰로 나가 통곡한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곁을 떠났던 헤더였다.
10편의 단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머물고 싶지만 머물지 못하고, 말하고 싶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고, 떠나고 싶지만 떠나지 못하며, 삶의 뻘 주변을 서성대고 버둥거리는 이들. 작가는 갓 건조해 낸 습기 없는 낮은 속삭임으로 그 목소리를 잘 들어 보라고 우리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는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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