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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피의 축제, 서바이벌 예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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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피의 축제, 서바이벌 예능

입력
2011.03.09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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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 딸이 주말에 TV를 보다 못마땅한 얼굴로 내 얼굴을 쳐다보며 진지하게 묻는다. "엄마 저 사람들 이미 가수 아냐? 근데 왜 또 가수를 뽑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프로그램. 장안의 화제를 이끌어낸 서바이벌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의 한 장면. 채널을 돌리면 케이블 TV '프로젝트 런어웨이 코리아'에서는 진정한 디자이너를 뽑는 미션이 벌어지고,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에서는 바늘구멍 만한 1등 모델을 차지하기 위해 어떤 혹평도 감수하는 초보 모델의 눈물겨운 노력이 펼쳐진다.

대한민국은 지금 오디션 중이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지금 대한민국의 케이블과 공중파 TV 예능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 과거에는 주로 신인들이 각고의 노력으로 라이벌들을 하나하나 떨어뜨리고 정상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이 그려졌다면, 이젠 기존 가수들도, '워크 오브 아트' 같은 프로그램에서는 심지어 미술품도 오디션의 칼날을 비켜갈 수가 없다.

기이한 것은 도저히 등수를 매길 수 없는 것들의 서열을 매기고, 도저히 경쟁시킬 수 없는 이들을 경쟁시킨다는 것이다. 시사IN의 고재열 기자 말대로, 온 나라가 손에 피를 묻혀야 살아 남는 거대한 검투장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왜 이렇게 죽기살기로 경쟁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게 되었을까?

사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는 승자독식보다, 패자부활의 미덕을 더 중요시 했던 때가 있었다. 또한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집단 안에서 재능과 부족함을 서로 나누어주는 인간적인 숨결이 놀이문화의 밑바닥에 숨겨진 시절도 있었다. 과거 운동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청백전 양상의 집단적 놀이문화는 '가족 오락관'이나 '가요 청백전' 같은 TV 예능프로그램에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서 그러한 집단적 협동이나 패자를 돌봐 주는 미덕은 고루하고 낡고 위험하고 재미가 없는 것이 돼 버렸다. 오직 경쟁에서 살아 남으라. 오직 개인만이 노력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라.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시청자들 특히 청소년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살벌하다.

사회가 이렇게 경쟁과 서바이벌 구도로 돌아가다 보니, CF에서는 오히려 무조건적인 덕담이나 칭찬을 시청자들에게 선사하며 마음의 위무를 주려 든다. 한 은행에서는 둘째 낳길 잘했다, 한국에 시집 오길 잘했다며 무조건적인 칭찬을 시청자에게 퍼붓는다. 어느 은행은 누구든지 함께 가주겠다는 '동행'을 모토로 삼는다. 어떤 대기업은 대 놓고 '무조건 칭찬하세요 반찬 투정하지 마세요 음식쓰레기를 버려 주세요'라고 남편들에게 조언한다.

지금 예능의 이름으로 우리가 관음하고 있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사실 개인화 분자화되어 가고 있는 대한민국 사회의 날 선 긴장감을 우리 스스로가 즐기는 피의 축제에 다름 아니다. 대중들 사이에 흘러 다니는 사회적 공분은 검투장의 대결로 소비되어지고, 승자가 수억 원의 상금에 환호할 때 패자는 어디에선가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고 심지어 목숨을 끊는다.

이제 대중은 어디에서 위안을 찾을 것인가? 경쟁사회, 오디션 사회가 싫은 일부 사람들은 지리산 같은 오지에 들어가 술을 마시며 취기와 한기와 오기로 세상을 버리고 사회를 잊기도 한다. 그러나 대중들은 그만큼의 여유도 없다.

새 봄이 다가오고 있다. 술에 취한 자 깨고, 손에 피 묻은 자 씻고, 살아 남은 자 슬퍼하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피 튀기는 오디션이 아니라 이 땅에서 소리 없이 죽어간 수많은 약자들을 위한 장례식일지니.

심영섭 영화평론가·대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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