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중생을 납치, 성폭행한 뒤 살해해 전 국민을 경악하게 했던 김길태(34). 그가 검거된 지 1년째인 10일 잔혹한 범죄의 무대였던 부산 사상구 덕포1동 재개발지역을 찾았다. 피해자 이양 가족이 살던 다세대주택과 살해현장인 일명 무당집은 출입을 금지하는 경찰의 경고문이 부착된 채 폐쇄된 상태였다. 이양의 시신을 물탱크에 유기한 파란 대문 집은 철거돼 공터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골목 안쪽의 일부 빈집은 누구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도록 방치돼 범죄 장소로 악용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주민들은 "골목에서 낯선 사람만 봐도 지레 겁을 먹고 집으로 뛴다"고 불안해 했다. 골목마다 빈집이 방치돼 있고 오가는 주민도 거의 없는 사건 현장은 화창한 봄 날씨에도 을씨년스러웠다.
한국일보의 취재 결과 양천구 신정동, 영등포구 도림동, 성동구 옥수동, 관악구 봉천동, 서대문구 북아현동 등 서울시내 주요 재개발지역의 치안상황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김길태 사건 직후 여성가족부 경찰청 지방자치단체 등 유관기관들이 재개발지역에 폐쇄회로(CC)TV와 가로등을 대폭 확충하고 순찰을 강화하겠다는 등 다양한 대책을 내놨지만 공염불인 셈이다.
9일 오후 9시 봉천동 재개발지역의 쑥고개시장 상점들은 문을 닫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2004년 정남규가 저지른 세자매 살인사건을 비롯해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아 불안해서 일찍 문을 닫는다고 입을 모았다.
이곳 주민들은 막연한 불안감이 아니라 실제 범죄의 공포에 떨고 있었다. 김진숙(46)씨는 "며칠 전 큰딸(19ㆍM고3)이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에 오는데 어떤 남자가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튀어나와 엉덩이를 만지고 도망갔다며 펑펑 울더라"면서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고 했다. 동네 미용실에서 일하는 하유선(27)씨는 "한 손님은 최근 서너 달 새 3번이나 치한을 만났다"고 말했다.
절도사건도 끊이지 않고 있다. 떡집을 운영하고 있는 김정환(66)씨는 "2, 3년 전부터 빈집이 늘어나면서 3번이나 도둑이 들었다"며 "그 때마다 파출소에 가서 이야기를 했지만 미안하다고만 했지 아무런 대책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고가의 CCTV를 달기 어려운 영세 사업자들은 궁여지책으로 'CCTV 촬영 중'이라는 문구만 붙여놓고 있었다.
최근 바바리맨이 출몰한다는 북아현동도 방치된 빈집이 범행에 악용될 우려가 높았다. 특히 사람들이 떠나고 비어 있는 북성 그린아파트는 지하주차장 출입문이 모두 열려 있어 누구나 드나들 수 있었다. 인적이 드문데다 이 곳을 비추는 CCTV도 없어 성폭행이나 살인사건이 일어나도 알 수 없는 사각지대였다. 이곳은 북성초등학교 정문에서 불과 50m 거리다.
재개발 지역에 CCTV와 가로등이 충분하게 설치되지 않아 주민들이 공포에 떨고 있지만 경찰의 순찰활동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도림동 재개발지역 주민 김모(48)씨는 "가끔 순찰차를 세워놓고 있는 걸 봤지만 그냥 차 안에 앉아 있어서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신정동에서도 이날 자정까지 경찰 순찰차는 한 대도 보이지 않았다. 자정 무렵 붉은색 경광등을 단 주민자율방범대 승용차 1대만 지나갔을 뿐이다.
경찰 관계자는 "골목 안쪽까지 순찰하라, 야간에 근무자가 없는 치안센터를 점검하라 등 순찰 매뉴얼이 있지만 크고 작은 사건 신고와 주취자 때문에 순찰을 돌 시간이 없다"고 해명했다.
큰 사고가 나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안이한 생각으로 관계 기관들이 범죄 예방활동을 게을리 하는 탓에 재개발지역 주민들의 불안은 전혀 해소되지 않고 있다. 옥수동 재개발지역의 한 주민은 "꼬박꼬박 내는 세금이 아깝다"고도 했다.
허정헌 기자 xscope@hk.co.kr
부산=강성명 기자 smk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