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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27> 아리랑의 애달픈 두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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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27> 아리랑의 애달픈 두 사연

입력
2011.03.08 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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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 답사를 한다고 국내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그 중에도 아리랑에는 유달리 정성을 기울였다. 그래서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멀고 먼 길을 헤매기도 했다.

정선 아라리를 찾아서는 강원도로 갔다. 인제 아리랑을 탐해서는 설악산 자락을 누비고 다녔다. 진도 아리랑을 듣기 위해서는 남해 바다의 서쪽 끝으로 가야 했다. 밀양 아리랑을 위해서는 영남 알프스의 중허리를 돌아다녀야 했다. 아리랑의 4대 고장을 두루 살피고 다녔다. 국내만이 아니다. 교포들의 아리랑을 찾아서는 해외도 누비고 다녔다.

왜 그랬을까? 그건 아리랑이 여느 민요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민요의 민요로,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정서로 응어리져 있는 게 다름 아닌, 아리랑이다. 우리 겨레의 영혼의 웅얼댐이 곧 아리랑이다. 서민들의 삶과 목숨이 거기 메아리치고 있다.

그래서 아리랑은 신바람으로 설레는가 하면, 서러움으로 저려오기도 한다. 봄의 꽃바람인가 하면, 낙엽 지는 가을바람으로 불어대기도 하는 노래다.

그래서 나의 아리랑 찾기는 명색은 학술답사였지만, 실상은 인생답사였다. 어렵게 힘겹게 목숨을 꾸려가는 사람들의 피땀이 내 온 가슴에 저며 들었다. 나는 그들의 신명으로 춤추는가 하면, 그들의 한탄으로 한숨지었다. 그러나 굳이 따지자면 서러움이며 애달픔이 더 짙은 게 아리랑이었다.

그래서 얻은 얘기를, 그래서 겪은 사연을 풀어 놓자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방방곡곡, 아리랑을 캐고 다닐 때, 나는 수 없이 눈물의 고개를 넘어야 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는 무슨 고갠고

구비야 구비가 눈물의 고개"

이렇게 웅얼대면서 넘고 또 넘어야 했다.

아리랑의 가락이며 노랫말에 붙여서 비로소 그 목숨이며 삶의 내력을 다진 사람들, 그런 사람을 수도 없이 만났다.

그런 중에, 정선에서 나는 절묘한 아리랑을 만났다. 늦은 여름 아침나절에 중년의 두 아주머니가 밭을 매고 있었다. 밭머리에서 짧은 인사말을 건네고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아리랑, 노래 한 가닥 불러 주시죠"

"노래는 무슨 노래"

겸연쩍어하는 아줌마에게 거듭 채근했다. 마지못했을까? 아줌마는 호미질로 장단 맞추면서 소곤대듯이 불러댔다.

"정선 읍내 물레방아는 물살을 안고 도는데

어쩌다 내 한 평생 밭고랑만 안고 돌아"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정선 읍내 물레방아는 물살을 안고 도는데 우리 집 낭군님은 날 안고 돌 줄 몰라.'이게 누구나 아는 정선 아라리의 원본 가사다. 한데 아줌마는 그 뒤쪽 마디를 자신의 처지에 맞추어서 즉흥적으로 바꾸어 부른 것이다. 그건 놀라운 재치였다. 원본 가사의 뒤쪽 마디는 어느 아낙이 그 채워지지 않는 사랑에 대한 불만을 투덜댄 것인데, 아줌마는 그걸 자신의 삶의 고달픔에 걸어서 바꾸어 부른 것이다.

내친 김에 물었다.

"얼마나 안고 돌았죠?"

"호미자루 석 자루 녹이도록"

"얼마 동안에요?"

"여름 한 철에"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단 한 철에 호미 자루를 셋씩이나 바꿔 끼우다니? 얼마나 호미로 부지런히 밭일을 했으면 그럴까?

그것도 호미 자루가 삭은 게 아니다. 녹았다고 했다. 그게 말이나 되는가? 한 여름 뙤약볕 아래서 호미로 밭을 매자면 온 몸에 땀이 밸 것이다. 호미 움켜쥔 손바닥이 화끈대면서 땀투성이가 되고 호미 자루도 땀으로 범벅이 될 게 뻔하다. 그래서 삭아서 못 쓰게 된 자루를 아줌마는 녹았다고 한 것이다. 당사자로서는 그건 허풍도 과장도 아니다. 실감이다.

하지만 이처럼 땀에 저린 아리랑 말고 눈물에 젖은 아리랑도 만났다.

"아아리 아아리랑 쓰으으리"

"내내 아아들…"

경남 밀양의 외진 마을에서 한 노인은 방안의 흙벽을 두들겨대면서 이렇게 노래했다. 아니 끙끙댔다. 더듬고 미루적거리고 했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이래야 제대로 된 '밀양 아리랑'이다. 한데도 여든이 넘은 영감님의 아리랑은 문드러지고 이지러지고 했다.

같은 소리를 되풀이 되풀이 질질 끌다 말고는 '내 아들'을 찾고 있었다. 그러고는 '드드득득' 하고는 흙벽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그건 아들을 찾는 소리였다. 지난날 일본 군국주의가 한창이던 때 일본 땅으로 강제로 끌려 간 채로 해방이 되고도 소식이 끊긴 막내를 찾는 소망이었다.

치매 기운에 저려서 말을 온전하게 못하는 노인에게 마지막 남은 말이 '아리랑'이었다. 인생 막장에서 차마 잊지 못하는 아들에 대한 그리움의 정을 '아리랑'에 붙여서 그는 노래했다. 그에게 아리랑은 살아서 남기는 마지막 유언이었다. 인생에 바라는 최후의 소망을 그는 아리랑에 붙여서 노래했다.

보기?두 곳만 들었지만 이 비슷한 감회에 젖은 아리랑을 시골 구석구석 농민이며 서민들에게서 듣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밀양 아리랑에서는 애달픔이, 정선 아라리에는 고달픔이 응어리져 있다. 그러나 어느 응어리나 한스러움, 바로 그것이기로는 다를 바 없다. 그것은 전국의 농어촌 어느 곳 어느 누구에게서나 듣게 될 아리랑의 주조(主調)이다. 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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