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홍대입구, 신촌, 종로, 혜화…. 식사 약속이나 술자리가 있어서, 영화 한편 보려고, 학원 때문에, 저녁시간 많은 이들의 발길이 이들 지하철역으로 쏠린다. 밤 늦은 시간까지 승강장이 북적거린다. 마지막 승객을 태운 막차가 떠나면 사람들은 심야버스 정류장으로 몰린다. 빈 택시를 잡으려는 발걸음도 분주해진다.
수도권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의 약 40%가 이처럼 밤 늦게까지 집 밖에 머무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리학자와 지리학자로 이뤄진 융합연구팀이 최근 내놓은 연구결과다.
지하철 승객 3가지 이동경로
연구팀은 후불제 교통카드(티머니)를 사용한 수도권 지하철 승객 50만 명이 이동한 경로를 컴퓨터로 분석했다. 그리고 이동패턴에 따라 승객들을 3가지 부류로 나눴다. 집과 직장 또는 집과 학교만을 오간 '착실한' 개미형은 전체 승객의 45%를 차지했다. 이들은 대부분 오전에는 지하철을 8~9시 사이에 탔고 오후엔 7~8시에 가장 많이 탔다. 대략 9시 전후 출근(등교)했다 8시 정도 퇴근(하교)한다는 얘기다.
승객의 38.5%는 오전엔 개미형과 비슷한 시간에 지하철을 탔지만 돌아올 땐 타지 않았다. 늦게까지 모임을 갖다 막차를 놓쳐 심야버스나 택시를 탔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놀기 좋아하는 베짱이형이다.
나머지 16.5%는 개미와 베짱이의 중간인 융합형. 적당히 놀다 지하철 끊기기 전에 헤어져 지하철로 집에 갔다. 이들은 지하철 막차를 많이 이용했다.
연구에 참여한 정우석 포스텍 기술경영대학원 교수는 "버스나 자가용 같은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 출퇴근하는 사람들도 있고, 하루 동안 찍힌 교통카드 기록만을 이용했기 때문에 이번 분석만으론 한계가 있다"며 "교통카드로 버스를 탄 승객들의 기록까지 확보하면 더 정확한 이동패턴 파악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연구결과는 지난해 10월 한국물리학회지에 실렸다. 연구팀은 또 이 데이터를 이용해 출퇴근 시간대와 낮 동안 승객들의 이동패턴을 나타내는 수학 함수를 만들어 국제학술지 '저널 오브 피직스A'에 제출했고, 최근 게재될 예정이다.
중력모형 닮은 고속도로 통행량
정 교수는 미국 보스턴대와 함께 국내 고속도로 통행량을 물리학으로 분석하기도 했다. 연구팀은 전국 30개 도시를 잇는 고속도로 톨게이트의 차량 이동 기록과 도시 간 거리, 도시별 인구의 상관관계를 컴퓨터로 살펴봤다. 그 결과 두 도시를 드나드는 교통량은 각 도시 인구의 곱에 비례하고, 도시 간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희한하게도 이는 뉴턴의 중력모형과 비슷하다. 중력모형은 두 물체가 서로 끌어당기는 힘(중력)이 각 물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물체 간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물리학 법칙이다. 정 교수는 "물체가 무거울수록 끌어당기는 힘(중력)이 많이 작용하는 것처럼 도시도 규모가 클수록 차량을 많이 끌어들인다는 게 증명된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유독 수원과 용인 안산 등 서울 주변 일부 도시에선 중력모형에 잘 들어맞지 않는 현상이 나타났다. 교통량이 도시가 끌어들일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소리다.
땅 위보다 공간적 제약이 덜한 항공 교통망에선 네트워크의 중심 역할을 하는 허브가 뚜렷이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비해 길을 넓히거나 새로 만들기가 쉽지 않은 도로 교통망에선 허브가 두드러지지 않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국내 고속도로 교통망에선 경부고속도로를 중심으로 허브가 나타났다. 결국 교통체증을 해결하려면 허브 형태가 생기지 않도록 인구나 차량을 분산시켜야 한다는 게 연구팀의 해석이다. 이 연구결과는 2008년 국제학술지 '유로 피직스 레터스'에 소개됐다.
한국은 이동패턴 연구 최적지
실제 사람이나 차량이 움직인 경로를 추적해 이동패턴이나 통행량을 컴퓨터로 분석한 연구는 세계에서도 이례적이다. 우리나라가 가진 독특한 데이터 덕분이다. 갈아탈 때 할인을 적용하기 위해 개인별 이동경로가 저장되는 교통카드, 전 국토 고속도로에서 요금을 받으며 개별 차량의 통행 정보를 기록하는 시스템은 다른 나라에선 드물다는 게 연구팀의 설명이다.
이번 지하철 승객 이동패턴과 고속도로 통행량 분석에는 복잡계 이론이 적용됐다. 많은 구성성분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현상 속에서 유기적 관계나 공통된 법칙을 찾아내는 이론이다. 최근 실제 일어나는 사회현상을 설명하는데 자주 활용되고 있다.
정 교수는 "사람들의 이동패턴에 영향을 주는 다른 요소들의 영향을 추가해 좀더 세밀하게 분석한다면 복잡계 이론이 도로망이나 대중교통 노선 설계, 배차간격 설정 등에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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