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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격 인터뷰] 영화감독 임권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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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격 인터뷰] 영화감독 임권택

입력
2011.03.04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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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 그리고 첫 번째 작품…"할 줄 아는 게 영화뿐이니 더 만들어야"

한국 영화계의 거목(巨木) 임권택 감독도 세월을 비껴가지는 못했다. 2일 H_인터뷰를 위해 서울 강남구 논현동 한 카페에서 만난 임 감독의 이마엔 굵은 주름이 더 짙게 패였고, 눈가에는 잔주름이 더 많아졌다. 그러나 꿈꾸는 소년처럼 선한 눈동자, 영화를 향한 열정은 77세의 나이, 다소 불편해 보이는 거동조차 사소하게 느껴지게 했다.

세계 영화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100편의 영화를 이미 만들었고 '서편제' '취화선' '춘향뎐' 등으로 국내외 영화제를 석권한 한국 최고의 감독이지만, 그는 지금 데뷔 때의 설렘, 떨림, 두려움을 느낀다고 했다.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를 만들어 오는 17일 개봉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성을 인정받고 흥행도 됐으면 좋겠다"는 그의 솔직한 속내에서 도전하는 '청년 감독'의 에너지마저 느껴졌다.

2시간 넘게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영화세계, 한국 영화의 미래, 그리고 특히 101번째 영화의 메시지에 대해 한 컷, 한 컷을 정성껏 찍는 연출 스타일처럼 진지하고 세세하게 설명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정말 하고 싶은 얘기를 털어놓기도 했다. "영원한 현역 감독으로 남고 싶다"고.

_ 101번째 영화가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내가 연출한 영화가 이번이 101번째지만 개봉을 앞두고 솔직히 불안하다. 사실 전에도 그랬어. 늘 그랬어. 특히 이번 작품은 100번째까지 내가 구축해놓은 영화적 이미지라고나 할까, 뭐 이런 걸 훌쩍 버렸어."

_버렸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새로 데뷔하는 정신으로 연출을 했다는 것이다. 애 많이 썼다. 근데, 나 혼자 한다고 되는 일인지 모르겠다. 관객들이 어떻게 봐줄지. 데뷔했을 때만큼 긴장된다. 내가 될 짓을 했는지…허허."

_영화 포스터를 라고 한 이유도 새로운 마음가짐을 의미하는가.

"그렇다고 보면 된다."

_국내 3대 영화배급사가 공동 배급하기로 한 것은 101번째 영화에 거는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뜻 아닌가.

"롯데엔터테인먼트, 쇼박스, CJ엔터테인먼트 등 3개사 공동배급은 전무후무한 일은 맞다. 스크린 수가 얼마나 될지는 못 들었다."

_그 동안 필름 촬영을 고수했는데 이번에는 디지털로 찍었다.

"세상 많이 바뀌었지. 필름 영화가 기하급수적으로 줄고 있다. 필름으로는 영화의 채산성을 맞출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필름을 고집하는 영화사는 문을 닫아야 하는 지경이야. 영화를 하고 있는 이상, 디지털을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지. 쭉 같이 해왔던 정일성 촬영감독이 한번도 디지털 촬영을 해보지 않아 이번 101번째 작품은 디지털 촬영을 많이 해본 젊은 기사와 작업했다."

_왠지 디지털과 필름 촬영의 차이를 크게 느꼈을 것 같다.

"전혀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디지털이 장점이 더 많더라. 필름으로 찍었을 때보다 예산을 아주 많이 절약할 수 있었다. 한번 촬영한 필름은 더 이상 찍을 수 없지만, 디지털은 지웠다가 또 찍을 수 있다. 이런 부분이 영화 제작에 많은 플러스 요인이더라. 또 필름으로 촬영하면 필름 값 때문에 여러 각도에서 찍기가 힘들다. 그러나 디지털은 여러 각도에서 찍어볼 수 있어 그 중에서 좋은 것, 잘된 것을 선택할 수 있다."

_디지털 촬영의 단점은 없다는 얘긴가.

"그렇지는 않지. 필름으로 찍을 때는 촬영 현장이 굉장히 긴장해있다. 왜냐하면 NG 한 번 나면 그게 모두 돈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NG를 줄이려고 스텝과 배우들이 함께 노력한다. 하지만 디지털 촬영 때는 시험 촬영을 해보는 식이야. 얼마든지 찍어도 비용과는 별 상관이 없다. 그러다 보니 스텝이나 배우들이 느슨해지더라."

_101번째 영화가 마지막인가.

"글쎄, 나이도 있고 해서 영화를 얼마나 더 만들지는 알 수가 없다. 근데 내가 할 줄 아는 게 영화밖에 없다. 언제까지 할지는 몰라도 놀고 있을 수는 없을 것 같다."

_젊은 세대를 겨냥한 다른 색깔의 영화를 만들고 싶은 생각은 안 해봤는지.

"왜 안 해봤겠는가. 하지만 그건 전혀 터무니없는 야심이라는 걸 알았지. 영화는 나이만큼 찍히는 법이지. 나이 든 감독이 젊은 세대들의 영화를 제대로 찍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런 것은 부질없는 욕심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자기가 살아온 인생의 경륜에서 쌓인 것들을 영화로 만들어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다. 젊은 세상 흉내 내는 것은 부담스럽다."

_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는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나.

"우리 한지가 고려 때만해도 중국 송나라에서 엄청나게 좋?평가를 받았다. 인삼 다음으로는 중국이 많이 가져갔을 정도였으니까. 종이의 질도 그랬고 여러모로 쓰임새도 좋았다. 그 좋은 종이를 생산했던 한국에서 지금은 그런 종이가 생산된 줄조차 모른다. 존재감 자체가 없어졌다. 중국에서는 선지라고 해서 정부가 많은 지원을 하고 명맥을 잇는 작업도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 것은 없다. 한지를 일본에 수출했으나, 일본인들은 이걸 가공한 다음에 일본 종이로 둔갑시켜 팔기도 했다. 한지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일깨우고 싶었다."

_더 설명해달라.

"한지를 되살려야 한다고 판단했어. 종이 제작자들이 예전의 우수한 한지를 이제는 만들 수 없다고 여기는 게 안타까웠다. 돈을 들여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옛날 종이와 같은 원료를 사용하고 비싼 공임을 들이면 현실적으로 팔릴 수 없는 고가의 한지가 되기 때문이다. 사실 그렇게 비싼 종이가 필요하지도 않은 시대다. '한지가 전설이 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지의 중심은 전북 전주야. 전주시에는 한지과(課)라는 독립된 부서가 있다. 장인(匠人)들의 전통 한지 복원 노력을 북돋는 게 주요 업무지. 공무원들은 되는 일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안 되는 일 같지도 않은 업무를 하고 있다. 이런 공무원들이 한지라면 지겨울 정도로 이곳 저곳을 쫓아다니는 얘기를 영화에 담았다. '우리 한지를 잊어버릴래?'라는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지고 싶었다."

_영화를 만들 때 무엇을 가장 먼저 생각하나.

"작품성이다."

_흥행은 고려 대상이 아닌가.

"그럴 리가 있나. 흥행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 제작에 막대한 돈이 들어가. 그렇지만 내겐 작품성이 더 중요하다. 아주 솔직히 말하면, 작품성을 갖추고 흥행도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인데,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더라. 혼신의 힘을 다했는데 흥행이 안 된 작품들이 많다."

_추구하는 영화의 화두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

"나는 한국인의 문화, 예술성 그리고 한국인들만의 혼을 알리는데 오랫동안 노력했다. 오랜 시간을 이런데 매달려 왔다. 그런데 100번째 영화를 만든 뒤 뭘 더해야 할까 생각하던 참에 한지 얘기를 듣고 이거다 싶었어. 덜컥 영화로 옮기게 됐다. 한지 역시 우리의 삶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야."

_한국인의 삶과 문화는 당신의 영화에서 불변의 소재인가.

"내가 만든 '씨받이'는 남아선호사상을 우리한테 되물었어. 이런 영화는 어느 날 후다닥 생각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야. 남아선호사상이 뿌리 깊은 우리 사회의 어느 집안에서든 불거졌던 문제고, 나도 그랬다. 그런 삶이 영화로 옮겨진 것이다. 93년에 제작된 '서편제'도 마찬가지야. 어렸을 때 고향에서 농요를 통해 판소리의 맛을 처음 알게 됐어. 62년에 '두만강아 잘 있거라'라는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자 호남지역 판권을 가졌던 분이 기분이 좋아 나를 기생집에 데려갔어. 판소리꾼 부르고 아쟁 가야금 할 것 없이, 그 좁은 방안에서 그런 공연 들으면서 얼이 빠졌다. 그 뒤로 끊임없이 판소리에 관심을 갖게 됐고, 십 여 년이 지난 뒤 판소리 소리꾼 일가의 얘기를 만들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내 영화는 그런 식이었어. 즉흥적으로 만든 영화는 거의 없다. 그 오랜 세월, 어디선가 마음 아래에 있었던 것을 영화로 만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삶과 문화가 공통된 소재였던 것이다."

_30, 40대 젊은 감독으로 돌아가도 지금 같은 영화를 고수하겠는가.

"그때로 되돌아가기 싫다. 영화는 힘든 작업이다. 젊은 감독시절 내 영화는 민망스럽고 미진하기 짝이 없었다. 그 시대의 영화는 그걸로 끝나야 해. 새삼스럽게 화장을 고친다고 그 작품이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

_슬럼프는 없었나.

"슬럼프? 없었지. 아마도 쉬지 않고 영화를 찍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놀아보라고 하면 어떻게 놀아야 할지 모를 정도니. 영화만 생각했고, 흥행이 안 된 작품들이 부지기수지만 영화를 쉼없이 만들어왔다. 슬럼프에 빠질 겨를이 단 한 차례도 없었던 것 같다."

-얼마 전 한 여성 시나리오 작가가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되면서 영화인 처우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그런 일이 없었어도 오래 전부터 영화인들이 열악한 환경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해왔다. 처우가 개선이 안 됐다. 사인이 아산(餓死)인지 아닌지 몰라도, 그런 일이 생긴 것 자체가 안 된 일이다. 다만 한마디는 해야 할 것 같다. 먹는 것 때문에 죽어야 할 세상은 아니야. 나는 자랄 때 그런 환경을 여러 차례 겪었고 그 고통을 극복하면서 살았다. 그 정도 의지는 있어야 하지 않나. 산다는 것은 별로 큰 어려움 없이, 고통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_우리 영화, 영화계에 대해 할 말이 있을 듯싶다.

"사실 우리나라 영화를 챙겨본 적이 별로 없다. 화제가 되고 있거나 영화제 등에서 상을 탄 영화를 더러 볼뿐이다. 그래서 우리 영화를 평가할 입장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 영화의 장래는 매우 밝다고 여기고 있다. 우수한 인력들이 영화를 배우고 있다. 외국 유학중인 학생들도 많다. 이런 유능한 인력들 때문에 자원이 고갈될 염려는 없다."

_너무 낙관하는 게 아닌지.

"그렇지 않아. 외국 영화제에 가보면 우리 영화의 위상이 높아졌음을 실감할 수 있지. 국내 감독의 안부를 외국 영화관계자들이 묻는 세상이다. 한국 영화가 빠르게 발전했다는 걸 보여주는 단면이다. 그러나 침체 또한 부인하기 힘들다. 어쩌면 지금도 침체기인지도 모르겠다. 중요한 것은 왜 침체 속으로 빠져있는지 원인을 찾아내 거듭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힘이 한국 영화엔 있어."

_당신 작품을 다시 보는지. 완벽주의자라는 평가도 있는데.

"내가 만든 영화는 안 본다. 그걸 보고 있으면 왜 그런 수준의 생각밖에 못했을까, 뭐 이런 자괴감이 들 것 같아서다. 한편으로 내 영화에 대한 자신감도 아주 강하다.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상을 탔을 때 심사위원장이 식사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하더라. '당신 영화는 전체가 완벽하고 지엽적인 부분도 완벽하다. 어쩌면 당신은 완벽주의자인 것 같다'고.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그런 사람이었구나 생각했다. 완벽하고 완전한 영화는 한 편도 못 찍었지만, 완벽은 지향하고 있다."

_궁합이 잘 맞는 배우는 있나.

"여럿 있지만. 누구 하나라고 찍어 말하긴 어려워."

_임권택 하면 강수연을 떠올리는 관객들이 많다.

"강수연양(그는 '씨'대신 '양'이라는 표현을 썼다)과는 사실 두 작품밖에 안 했다. 그것도 아주 어린 나이 때 했기 때문에 그를 잘 몰랐다. 강양이 마흔 살을 넘기면서 좀 더 가깝게 알게 됐지. 강수연은 영화배우가 아니었어도 다른 일로도 크게 성공했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강양이 고교 때 '씨받이' 주연을 했는데, 그 나이에 굉장히 잘했다. 어린 나이엔 감당하기 어려운 엄청난 시련을, 저 어린 배우가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고 배역을 맡겼는데, 아주 잘해줬다. 그 다음엔 비구니로 등장한 '아제 아제 바라아제'에서는 수행을 하는 여승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 삶을 연기로 너무도 잘 표현해내는 그런 배우다. 이젠 40대가 갖는 중년의 매력이 드러나는 영화를 찍는다면 이미지가 거듭나는 그런 연기자가 될 것이다."

_당신의 영화인생은 어디에 와 있는가.

"나의 영화인생을 한번도 재단한 적이 없어. 끝이 언제일지 생각 안 해 봤다. 늘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영화를 만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이로 치면 이젠 치매 같은 노인성 질환을 앓지 말아야 하는 때가 된 것은 분명하다. 치매 걸린 영화인이 돼선 안 된다는 다짐을 한다. 그런 것을 늘 경계하고 있다."

_좋은 영화는 어떻게 해야 만들어지나.

"영화를 만드는 주체가 감독이라면 사심이 없어야 한다. 삶을 영화에 담아내는 게 감독이 하는 일이라면, 담아내는 사람들의 정신이 문제가 아니겠는가. 맑은 심성과 창의성, 이 정도가 좋은 영화의 조건이라고 믿고 있다."

_관객들이 임권택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부분도 있나.

"그런 것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든 영화가 한 두 편이 아니다. 다만 영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관객에게 전해지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그건 내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를 통해 비친 모습이 바로 감독 임권택이다."

-감독 임권택과 인간 임권택은 동일한 모습인가.

"분리가 되는 것은 잘 모르겠다. 단지 현대사의 질곡을 겪으면서 삶은 고통이라고 생각해왔다. 나중에 이런 게 영화를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됐다. 해방과 5ㆍ16혁명, 5ㆍ18 민주화 운동 등 중요한 시대를 살아왔고, 아픈 체험이라고 해야 될지, 아니면 소중한 체험이라고 해야 될지, 이런 것들을 끌어다가 영화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이 행운이었다. 가장 좋아했던 영화라는 매체를 만들면서 살아온 자체가 행복이었다. 한때는 그렇게 고통스럽고 잊어버리고 싶고, 버리고 싶었던 모든 삶의 체험이 주는 누적들을, 모두 영화에 옮겨서 찍어낼 수 있었다. 그것 말고는 없다."

■ 임권택 감독은… 가족 중 좌익 많아 수난의 세월

자기 나이(77세)보다 많은 영화를 만든 임권택 감독의 삶 역시 한편의 영화였다. 1934년 전남 장성에서 출생한 그는 18세 때 광주 숭일고를 중퇴, 혈혈단신으로 낯선 부산에 정착했다. 시쳇말로 가출한 것이다. 가족 중에 좌익이 많다는 이유로 수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그는 무작정 집을 뛰쳐나갔다. 그는 "같은 민족끼리 좌우로 나눠 싸웠던 시대였다. 꿈도 희망도 없었다. 젊은 시절 노동판을 전전했던 것도 시대에 대한 회의감 때문이었다"고 회고했다.

영화계에 뛰어든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알고 지내던 군화 장사꾼들이 서울로 올라가 영화사를 차린 뒤 그를 부른 것이다. 심부름 등 잡일을 할 사환이 필요했던 것이다. 영화사에 둥지를 튼 그는 제작부에서 소품을 담당하면서 영화를 처음 접했다. 이후 연출부로 옮겨 7년이 넘게 어깨너머로 연출을 배우면서 감을 익혔고, 국내외 서적을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 그 때 "영화가 바로 내가 가야 할 길"이라는 영감이 떠올랐다. 28세인 1962년 첫 작품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그는 초기엔 다작(多作)감독이었다. 1960, 70년대에는 10년 동안 50편이 넘는 영화를 찍었다. 임 감독은 "먹고 살기 위해 막 찍었다"고 실토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80년대부터 그의 영화는 작품성에 방점이 찍혔다. 특히 우리 역사와 전통, 한국적 사랑과 삶이 짙게 투영됐으며, 그것은 임 감독 스스로 부대끼며 살아온 삶이었다.

상복도 많았다. '춘향뎐'으로 제36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대상과 감독상, 제20회 하와이국제영화제 최고작품상, 제45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이상 2000년)을 받았으며 '취화선'으로 칸영화제 감독상, 청룡영화상 감독상(이상 2002년)을 수상했다. 또 제5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명예금곰상(2005년), 제10회 이천춘사대상영화제 특별공로상(2002년)을 받았다.

그는 1979년 49세 나이로 여배우 채령(62)씨와 결혼, 아들 둘을 뒀으며 둘째 아들 권현상(22ㆍ본명 임동재)씨가 영화 '고사2'에 배우로 출연했다.

■ 임권택 주요 작품

1970년대= '잡초(73년), '맨발의 눈길'(76년), '상록수'(78년), '깃발 없는 기수'(79년), '짝코'(80년)

80년대= '만다라'(81년), '길소뜸'(85년), '씨받이'(85년), '티켓'(86년), '아제 아제 바라아제'(89년), '장군의 아들'(90년)

90년대= '서편제'(93년), '태백산맥'(94년), '춘향뎐'(99년)

2000년대= '취화선'(2002년), '하류인생'(2004년), '천년학'(2007년)

김진각 편집위원 kimjg@hk.co.kr

■ 임권택의 101번째 영화 '달빛 길어올리기' 시놉시스

임진왜란 당시 불에 탄 <조선왕조실록> 중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史庫) 보관본을 전주시 공무원이 전통 한지로 복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000년을 간다는 한지 되살리기 과정이 밀도 있게 그려졌다.

전주시의 만년 7급 공무원 필용(박중훈 분)은 3년 전 아내 효경(예지원 분)이 뇌경색으로 쓰러지자 아들을 큰 집에 맡긴 뒤 거동이 불편한 아내의 수발을 들며 어려운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유일한 꿈은 퇴직 전에 5급 사무관이 되는 것. 그러던 그에게 기회가 왔다. 새로 부임한 상사가 한지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승진을 위한 마지막 찬스란 생각에 한지과(課)로 옮긴다.

2년 동안 전국을 돌며 한지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 프로듀서 지원(강수연 분)은 우연히 필용을 만난다. 티격태격하면서도 필용이 추진하는 한지 복원에 동참하게 된다. 뜻하지 않은 시련이 닥치면서 한지 복원 사업이 한때 무산될 위기를 겪기도 하지만 한지 복원은 끝내 결실을 보게 된다.

인터뷰=김진각 편집위원 kimj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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