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그림 로비' 의혹 등을 받고 있는 한상률 전 국세청장의 자택과 한 전 청장에게 그림 '학동마을'을 판매한 서미갤러리를 3일 전격 압수수색했다. 한 전 청장과 관련된 의혹에 대해 본격적인 강제 수사에 나선 것으로 풀이되나, 이미 지난달 28일 한 전 청장을 소환 조사한 다음에야 비로소 압수수색에 나서 그 배경을 놓고 해석이 분분하다.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부장 최윤수)는 이날 오전 10시쯤 검사와 수사관 20여명을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에 있는 한 전 청장 자택과 서울 종로구 가회동 및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서미갤러리 등 3곳에 보내 각종 그림과 한 전 청장의 국세청 재직시 업무 다이어리 등 문서, 회계장부, 컴퓨터 하드디스크 등을 확보했다. 서미갤러리는 2007년 1월 한 전 청장의 심부름으로 국세청 직원 장모씨가 '학동마을'을 500만원에 구입한 곳이다.
검찰의 압수 목록에는 한 전 청장 자택에 있던 그림 7~8점도 포함됐다. 일단 한 전 청장 소유 다른 그림들의 유통 경로를 추적해 한 전 청장이 전군표 전 국세청장에게 인사청탁과 함께 건넨 것으로 알려진 '학동마을'과 관련한 단서를 얻으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한 전 청장이 "단순한 선물이었을 뿐"이라고 혐의를 부인하고 있어 '학동마을'의 전달 경위를 놓고 정확한 성격 규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한 전 청장이 모두 5점의 그림을 구입했으며 전 전 청장 외에 정권 실세에게도 그림 로비를 했다'는 의혹에 대해 검찰이 손을 뻗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검찰 수사가 압수수색을 기점으로 강공으로 선회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분석도 만만치 않다. 이날 압수수색은 통상적인 수사 절차와는 달리 순서가 뒤바뀐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검찰은 일반적으로 사전에 참고인 조사나 계좌추적, 압수수색 등을 통해 객관적 물증을 충분히 확보한 뒤 수사의 마지막 단계에 핵심 피의자를 소환 조사한다. 피의자가 거짓말로 빠져나갈 구멍을 최대한 봉쇄해 놓는 것이 우선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번 압수수색은 한 전 청장을 소환한 지 사흘이나 지나 실시된데다, 그림 로비 관련 의혹도 이미 2년 전에 제기된 것이어서 증거인멸의 시간이 충분했던 점을 감안하면 그 결과가 신통치 않을 가능성이 높다. '뒷북 수사' '면피용 압수수색'이라는 비판적 시선이 나오는 것은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반면 검찰이 압수수색이라는 강수를 둔 것은 상당한 수사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는 해석도 있기는 하다. 이귀남 법무부 장관이 국회에서 "국민이 의혹을 갖고 있는 부분은 수사하겠다"는 취지로 답변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검찰이 수사 수위를 조절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사팀이 한 전 청장 구속을 위해 전방위 비리 캐기에 나섰다는 얘기도 나온다. 검찰 관계자는 "이번 주 중 참고인 1~2명을 조사한 뒤 이르면 다음 주에 한 전 청장을 재소환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한편 2007년 대선 직전 'BBK 의혹'을 폭로했던 에리카 김(47)씨 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 이동열)는 4일 옵셔널벤처스(BBK투자자문의 후신) 직원 등을 참고인으로 불러 조사한 뒤, 다음 주쯤 김씨를 재소환할 계획이다. 검찰은 김씨의 동생 경준(45ㆍ수감 중)씨에 대해서도 이르면 이번 주말 참고인 조사를 실시할 방침이다.
검찰은 한 전 청장과 김씨 사건이 서로 얽혀 있는 지점인 이명박 대통령 관련 '도곡동 땅'의 차명 소유 의혹도 다시 들여다 보기로 했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검찰이 의혹을 밝히는 기관은 아니지만, 수사결과 발표 때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설명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김정우기자 wookim@hk.co.kr
남상욱기자 thoth@hk.co.kr
▦ 서미갤러리
2007년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에서 비롯된 ‘삼성 비자금 의혹’ 특검 수사 당시 삼성가(家)의 미술품 구입 경로로 지목된 곳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부인 홍라희씨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 ‘행복한 눈물’(거래가 716만달러) 등을 삼성의 비자금으로 구입할 때 통로로 활용됐다는 의혹이 제기돼 압수수색을 받았고, 홍송원 대표는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았다. 홍 대표는 “‘행복한 눈물’의 실 소유주는 나이며, 홍라희씨한테 구매 권유를 위해 며칠간 집에 걸어두게 한 뒤 돌려받았다”며 의혹을 부인하고 작품을 공개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한 전 청장 관련 의혹으로 3년 만에 다시 수사 대상에 오른 것이다.
▦ 도곡동 땅 의혹
2007년 7월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의 대선 후보 경선 경쟁자였던 박근혜 전 대표 측이 “이 후보 친형과 처남 명의의 도곡동 땅은 이 후보의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불거졌다.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지만 “도곡동 땅은 제3자의 차명재산으로 보인다”고 애매한 결론을 내리면서 의혹은 더욱 증폭됐다. 결국 이 대통령 취임 직전 실시된 특검에서 “도곡동 땅은 친형 이상은씨 소유”라고 발표되면서 논란은 가라앉았다. 하지만 지난해 안원구 전 국세청 국장이 “2007년 포스코건설 세무조사 과정에서 이 대통령이 도곡동 땅의 실소유주임을 보여주는 문건을 봤다”고 주장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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