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20위권 재벌그룹의 장녀 A씨(34)에겐 신용카드에 관한 '쓰라린 추억'이 있다. 롯데카드의 '인피니트'에 가입신청을 했다가 거절당한 것. 인피니트는 롯데카드의 엄선된 최상위 고객에게만 발급되는 말 그대로 VVIP카드다. 재산 직책 신분 나이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발급하는데, 회원이 수십명에 불과하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당시 그는 계열사 전무를 맡고 있었는데 아무리 오너 자제라도 전무급에는 이 카드가 발급될 수 없었다"며 "거의 모두 50대 이상인 타 회원들에 비해 30대 초반인 그의 나이는 너무 어리다는 점도 고려됐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반면 신한카드의 VVIP고객 중엔 가수 B(25)씨가 있다. 돈 잘 버는 인기 연예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가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인기를 끄는 한류스타라는 점 ▦스캔들이나 구설수가 없는 모범적 사생활 등이 감안됐다는 후문이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B씨가 재벌가 장녀보다도 신분이 높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카드사마다, 또 VVIP 카드종류마다 회원심사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잣대로 얘기하긴 힘들다"고 말했다.
누가 가입하나
지각변동 조짐이 보이는 카드업계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VVIP마케팅도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다. VVIP카드는 연회비만 최대 200만원, 월 사용한도가 1억원에 달하는 초우량고객만을 위한 슈퍼 프리미엄 카드. 월 사용금액은 평균 1,000만원이 넘어 일반 카드의 10배 이상인 반면, 연체율이나 해지율은 제로에 가깝다. 업계 관계자는 "VVIP 고객은 수적으로 0.05%정도에 불과하다"며 "그러나 포화상태에 이른 카드시장에서 리스크는 전혀 없으면서도 매출에는 절대적 기여를 하는 VVIP고객을 확보하는 것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말했다.
카드사마다 누가 VVIP고객이 되는지에 대해선 절대 비밀로 통한다. 돈이 많다고, 직급이 높다고 무조건 가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카드사가 재력 평판 업적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해 대상자를 비공개 초대하는 식이다. 카드사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보유자산 30억원 이상 ▦연 매출 1,000억원 이상인 기업의 CEO ▦대형 병원 원장 ▦법무법인 대표변호사 등이 '후보군'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평판이나 다른 회원과의 조화 같은 '비계량적 요소'도 개입된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이름을 대면 알만한 유명 연예인과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거절당한 적이 있다"면서 "꽤 규모가 있는 중소기업 사장이나 병상 100개 미만 병원 원장 등은 심사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밝혔다. 2005년 업계 최초로 VVIP 카드(더 블랙)를 선보인 현대카드가 가장 많은 2,000여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으며 신한카드(프리미어)는 1,000여명, 그리고 후발주자인 하나SK카드(클럽원)는 600여명 수준이다.
왜 열광하나
VVIP카드는 늘 수요초과다. 그 이유는 ▦회비를 능가하는 혜택 ▦네트워크 형성 기회 ▦금전적으로 환산키 어려운 배타적 경험 등. 현대카드 관계자는 "해외특급호텔과 항공권 할인ㆍ무료 서비스 등 매년 제공되는 혜택은 (연 회비를 훨씬 뛰어넘는) 500만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인맥형성의 수단도 된다. 카드사들은 VVIP를 대상으로 한 별도의 골프대회 음악회 강연 등을 개최하는데, 그냥 회원이라고 모두 한꺼번에 부르는 게 아니라 공통 관심사나 취미 등에 따라 동호회식의 소규모 모임을 주선한다는 것. 예컨대 신한카드는 지난달 24~25일 음악에 관심 있는 VVIP 24명만을 추려 '오르골 음악회 및 테라피'행사를 열기도 했다.
'배타적 경험'은 VVIP카드회원만의 특권.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을 재현한 세트장에서 모의 경매를 해보고(현대카드) 최고의 프랑스 와인을 생산하는 '샤또 꼬스 데스뚜르넬' 포도원 소유주와 만나 와인을 즐기기도 한다(하나SK카드). 심지어 '소원'을 들어주는 개인별 의전서비스까지 제공하는데, 삼성카드 관계자는 "전투기 조종사가 꿈이었던 중년 회원이 L-39전투기를 타고 호주 헌터밸리 상공을 날 수 있도록 비행훈련일정 등을 잡아줬으며 결혼 25주년 때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자 사이먼 래틀의 공연을 보고 싶어한 부부 회원을 위해 관람일정을 잡고 기념사진까지 찍을 수 있도록 주선했다"고 말했다.
물론 일각에선 "부자와 서민을 의도적으로 갈라 놓는 카드사들의 위화감 마케팅" "돈벌이를 위해 그들만의 리그를 만든다"는 비판도 나온다. 하지만 카드업계 관계자는 "어느 제품이든 프리미엄 시장은 별도로 존재하고 소득수준향상에 따라 그 비중은 점점 더 커질 수 밖에 없다"면서 VVIP마케팅은 더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했다.
강아름 기자 sara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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