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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26> 아리랑: 교포들의 비극의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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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열규의 휴먼드라마] <26> 아리랑: 교포들의 비극의 행적

입력
2011.03.01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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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민속 답사를 한답시고 참 많이 돌아 다녔다. 방방곡곡 농촌이나 산골마을을 누비고 다녔다. 아리랑도 조사 대상으로는 큰 몫을 차지했었다. 그런 중에 국내의 어느 대표적인 방송사가 창립기념으로 하게 된 '아리랑 특집'의 제작에 참여하게 되면서 아리랑 조사는 본격적인 것이 되었다. 여름 방학 내내 국내만이 아니라 외국도 돌아다녔다.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서 시베리아 동북부에서 이주를 강요당한 교포들을 찾아서는,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까지도 갔었다. 그런가 하면 2차 대전 당시, 일본 정부에 의해 광산의 인부로 강제로 징용당한 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소련 정부에 의해서 억류당한 교포들을 찾아서는 사할린에도 갔다. 온 지구의 3분의 2 정도는 돌아 친 셈이다.

나로서는 문자 그대로 고행이고 고생길이었다. 멀고 먼 이국 땅에서 겪어야 했던 삶의 비극을 교포들이 아리랑에 실어서 노래했을 때, 그 서러움이며 슬픔의 사연은 듣는 사람의 가슴을 비통하게 찢어지게 했기 때문이다.

'이국 만리 남의 땅에, 메마른 남의 땅에

목숨 붙여 살라니 눈물도 말랐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이렇게 교포들은 그들 삶의 궤적을 아리랑으로 그려 보였다. 아리랑은 누구나 알다시피 우리의 대표적인 민요다. 굳이 한국의 민요 하나만을 고르라고 한다면, 누구든 서슴없이 아리랑을 꼽을 것이다. 그 점은 해외 교포에게서도 마찬가지였다.

두만강 건너 시베리아 땅에는 이미 대한제국 때부터 동포들의 이민이 시작되었다. 그 얼음의 땅에 가까스로 터전을 잡았다 싶었던 바로 그 무렵, 그들은 중앙아시아의 소련 땅으로 내쫓겨야 했다. 불과 출발 하루 전에 통보를 받았다. 이삿짐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다. 부랴부랴 보따리 두어 개 싸 들고는 거지꼴로 기차에 실렸다. 객차가 아니었다. 짐 싣는 칸에 짐짝처럼 실려 갔다. 그런 꼴로 근 열흘을 중앙아시아까지 가야 했다.

물론 행방이 알려지지 않았다. 잠자리는 말할 것도 없고 끼니조차 제대로 챙겨먹지 못했다. 목이 타도 마실 물이 없었다. 어떻게도 할 수가 없었다. 중도에서 기차가 제법 오래 지체할 때를 틈타서는 화톳불에 밥이라고 지어 먹는 게 다였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꼴이었다.

그런 얘기를 하는 중에 어느 교포는 차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기차가 시베리아 어느 외딴 허허벌판에 잠깐 섰다. 그 틈에 똥오줌을 누라는 것이었다. 사내들은 돌아 선 채로 아무데서나 용변을 했지만 여자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기차의 짐칸 사이의 비좁은 틈새에 몸을 숨기고는 웅크려야 했다.

그런데 용변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문득 기차가 출발할 줄이야! 아낙네며 처녀 몇이 그대로 기차 바퀴에 깔리고 말았다. 그 참극도 모른 척하고는 기차는 제 갈 길을 서둘렀다고 했다. 그게 명색이 무산대중을 위하고 인만을 위한다는 소련 공산 정권이 한 짓이다. 스탈린 독재가 저지른 만행이다. 그것은 단적으로 인민 학살사건이었다.

'오줌 누고 똥 누던 우리네 여인들

바퀴로 깔아 죽인 이민 열차여.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얘기를 하다 말고 교포는 이렇게 노래 부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한데 비참함은 이로써 끝나는 게 아니었다. 며칠을 그런 꼴로 달린 끝에 기차는 드디어 종착지에 닿았다. 역도 역사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고 한다. 사람 사는 기척은 전혀 없는 들판이었다.

기차가 떠난 뒤에 기가 찼다. 어떤 방도도 없었다. 황무지 한가운데 내버려진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방도가 생각나지 않았다. 내게 그간의 사정을 얘기해준 교포는 그 때 누이를 잃었다. 며칠 굶다시피 한데다 추위로 감기를 심하게 앓던 누이였다. 극도로 쇠약해 있었다.

기차에서 내렸지만 하다못해 천막이나 간이 막사조차 없었다. 누이는 노지에서 며칠을 보낸 끝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시신은 이내 눈에 덮이고 말더라면서 교포 오라비는 울음을 삼켰다. 2차대전 전후해서 독일의 나치 정권에 의해서 강제로 끌려간 유대인들조차 이때의 우리 교포들보다는 월등히 좋은 대접을 받은 셈이다. 그들에게는 하다못해 막사라도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런 극악한 상황에서 황무지 개척에 교포들은 몸을 바쳤다. 마침 우즈베키스탄 원주민들의 도움을 받을 수가 있었던 게 천행이었다.

밭만을 일군 것은 아니다. 소금기가 밴 모래땅을 논으로 가꾸었다. 그 당시 소련 영토이던 중앙아시아에 역사상 처음으로 논농사를 가능케 한 것이다. 그런 각고의 노력 끝에 교포들은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일대의 집단농장 가운데서 가장 잘 사는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들렀을 때, 냔?지도자는 그 점을 큰 자랑으로 내세웠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그것도 월등한 유를 창조한 긍지였다.

이렇게 조사며 면담이 이루어지는 중에 타슈켄트 시내에서 우연히 한 교포를 만날 수 있었다. 이미 60이 넘은 그는 스스로를 인민배우라고 하면서 그 증명서를 자랑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출연하기도 했다면서 우쭐댔다.

한데 이제 남은 소원은 현지 교포의 삶의 비극을 무대에 올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건 인류 역사에 남을 비극이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내가 현지 교포의 아리랑을 찾는 중이라고 하자

'피눈물로 말하리라

우리 교포의 비극을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그는 중얼대듯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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