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 곳 미국 샌디에고에 많은 비가 내린다. 늘 햇빛이 바다와 어우러져 한껏 출렁이는 지루하도록 좋은 휴양지 날씨도 겨울 우기로 접어들면 비가 내린다. 이 비조차 내리지 않는다면 애잔한 향수는 견디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칸국제영화제 클래식부문에 초청된 지도 벌써 6년이 다 되었다.
햇빛과 바다가 짝을 이뤄 세계적인 영화휴양도시가 된 칸에서 2005년 내 영화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클래식 부문에서 상영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1972년에 홍콩에서 제작한 후 1973년에 미국에서 개봉되어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했던 영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영화라 해 재평가 받고, 타란티노 감독이 그의 영화 ‘킬빌’로 오마주(경배)를 해 새삼 떠올랐던 죽음의 다섯 손가락.
칸에서 날아온 소식을 듣고 문득 가슴이 먹먹했었다. 늘 기억에 남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내게 한국평단은 흥행 액션 영화감독이란 평가 외에는 별반 후한 점수도, 감독상도 주지 않았는데, 칸에서는 내 영화를 클래식 반열에 올려주었으니 말이다. 칸은 내게 그 역사나 명성 때문이 아니라 내 영화인생에 있어 상징적이면서도 이중적 정체성을 함축하는 것이었기에 난 그토록 가슴이 먹먹했던 것 같다. 난 한국영화 초창기의 척박한 터전에 한국영화의 다양성을 모색한 한국영화감독이었지만 늘 이방인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준 또 다른 이방인이기도 했다.
영화의 역사는 1895년 뤼미에르 형제의 ‘기차의 도착’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난 그로부터 50여년 뒤인 1946년 한국영화초창기에 영화계에 첫발을 들였다.
내가 영화를 시작한 그 무렵 한국영화계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나는 한국영화 초창기의 역사 속에 등장하는 소수의 ‘전설적인 웰메이드(well-made)감독(이렇게 자평하자니 좀 머쓱하지만)’이었지만, 한국영화의 암흑기라는 1970년대에는 홍콩에서 영화를 만들었고 지금은 샌디에고에서 한국영화의 할리우드 진출을 돕고 싶어 하는, 어찌 보면 한국영화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반평생을 한국바깥에서 이방인으로 살아온 아웃사이더이기도 하다.
영화에 대한 열정으로만 본다면 여전히 ‘영화청년’이라고 우기고 싶지만, 어느덧 세월은 쏘아놓은 화살처럼 흘러 이제 이렇게 회고록을 쓰도록 갖은 종용과 외압(?)에 시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고록 집필이 꺼려지는 이유는 관련된 여러 인연들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 입힐 수 있는 ‘진실’들이 거론될 수 있고, 일파만파(一波萬波) 소란스러운 가십거리 하나 더 보태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회고록에서 건드릴 수 있는 그 어떤 상처와 회한도 엄연한 한국역사의 한 면이다. 더구나 영화에 대한 열정 가득한 후학들이 여러 번 내게 충언하기를, 내 회고록을 통한 소소한 사실들이야말로 그들이 연구해야만 하는 귀중한 한국영화사라는 것이었다. 그들의 열정과 간절한 눈망울은 비로소 내 어리석은 마음을 움직였다.
난 1928년 11월에 태어나 서울에서 자라났다. 영흥실업주식회사라는 무역회사를 운영했던 부친(정위영)은 해방직후 한국독립당 중앙위원으로 김구선생을 모시며 혼란기 한국정치 속에서 올곧은 역사관과 정치적 이념을 실현하시려 했다. 정치와 사업을 병행하던 부친의 팽팽하게 긴장된 삶 속에서 장손인 나는 마땅히 가정의 안정을 위해 조속히 부친의 사업을 이어 받아야 했고, 이를 위해 경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나 2남3녀 중 맏아들이자 존경하는 부친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막중한 책임감에도 불구하고, 상업보다는 예술 쪽에 더 마음이 기울어 갈등해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집안에서 거는 기대와 개인 자신이 원하는 소위 자아실현의 간극이 클수록 그 압박감은 그만큼 버거워진다. 나 역시 결단을 내려야 했다. 결국 부친을 설득하여 서울음악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엔 상업에 대한 나의 대안은 음악뿐이었고, 그저 마음이 원하는 쪽으로 향해 갈 뿐이었다.
결국 서울음악학교2학년 재학 중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1946)를 보면서 ‘나도 감독을 해봐야겠다’며 뜻을 세웠다. 음악적 리듬이 영화 속에 넘쳐나 있었고, 추상적인 음악이 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영화 속에 구현되어 있었다. 영화에서 내가 진정 원하는 ‘예술’을 발견한 것이다. 자유만세는 지금 봐도 흥미진진한 항일 독립투사들의 이야기인지라 그 강렬한 주제의식에 경도된 한 편, 그러한 주제를 드러내는 탄탄한 시나리오와 빠른 템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는 최 감독의 재치와 기교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어떻게 해서든 최 감독 밑에서 영화 연출 수업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최인규 감독은 당시 이미 한국영화에 있어 독보적인 존재였다. 또 대학에 영화학과가 전무했기 때문에 대학에서 정식으로 영화를 배울 수 없던 그 시대상황에서 내가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선택한 최선의 방법은 최 감독 문하생으로 들어가 현장교육을 받는 것뿐이었다.
운명적 인연이었던지, 부친과 친분이 있으셨던 최 감독의 형(당시 고려영화주식회사 사장) 최완규씨의 도움으로 최 감독의 문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네가 정창화냐?” “그렇습니다.”
“얘긴 다 들었다” 하더니 다짜고짜 깡통 두 개를 내 놓았다.
그리고선 “너 내일부터 이 깡통 두 개 중 하나에 밥을 넣고 또 하나에는 설렁탕을 담아가지고 매일 여덟 시까지 여기 갖다 놔”라고 했다. 최 감독은 당시에 집에도 거의 못 들어가고 명동 입구에 있는 5층 건물 고려영화협회에서 살다시피 했다. 최 감독의 부인은 여배우 김신재였으나 둘은 거의 별거하다시피 했고, 당시 최 감독은 신인 배우 최지애와 동거를 하고 있었다.
“이렇게 깡통에다 담아 잡수시지 말고, 제가 설렁탕 집에서 배달을 할 수 있도록 해드리겠습니다”하니, 최 감독은 버럭 화를 냈다. “야, 그 정돈 나도 할 줄 알지. 응? 왜 굳이 너한테 이걸 하라 그래? 내가 전화하면 다 배달되는데. 그러나 이건 네가 해야 될 일이야.” 참으로 난감했다. 깡통에다가 철사까지 달아 놓았으니… 그 시대에는 거지들이 그와 똑같이 깡통에다가 철사를 달아 밥을 얻으러 다녔었다.
매일 아침 여덟 시에 설렁탕을 담아가지고 명동 출근인파를 헤치고 가다 보면 주위 행인들이 모두 기이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멀쩡하게 생긴 놈이 거지 깡통을 들고 다니니 행색이 묘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번은 명동에서 친구들을 만났는데, 모두들 눈이 휘둥그래져서 “야, 너 왜 그러지?”하고 물었다. 내 정신이 이상해진 걸로 그들이 여겨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인파는 많고, 자초지종 설명하기도 마땅치 않아 “나중에 얘기할 테니”라며 얼버무려야만 했다. 그리고선 깡통을 최 감독에게 주고는 화장실에 가서 눈물을 닦아내야만 했다.
한 두어 달 넘게 그 짓을 했는데, 어느 날 최 감독이 나를 불렀다. “창화야, 이제 그만해도 된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아마도 최 감독 입장에선 부유한 집 20대 도령이 영화감독을 한다고 나선 자체가 마뜩잖았던 것 같다. 나를 상당히 나약하게 본 듯 했다. 실제 최 감독은 나에 대해 “온실에서 자란 청년”이라고 평가한 바도 있다. 고생도 안하고 귀공자로 자란 놈이 그 어려운 영화계에서 감독이 될 수 있겠는가 최 감독은 테스트를 한 것일 테다.
이렇게 인연을 맺기 시작한 최 감독에게 배운 것은 현장에서 해야 하는 감독 수업은 물론 혹독한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끈기였다. 그는 냉철한 성격이었고 현장 진행에 있어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 때는 야속하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지금의 내가 있게 된 단단한 근간이고 넉넉한 배양토였기에 고맙기 그지없다.
하여튼 깡통 배달을 중지 시키고선 최 감독은 “내일부터 연출부에서 일을 해라”고 말했다. “그럼 제가 무슨 역할을 하면 됩니까?”라고 여쭈니 최 감독은 “너는 항상 내 옆에 붙어 있다가 내가 뭔가 지시를 하면 그 문제를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나는 “알겠습니다”라고 짤막하게 대답을 했고, 그 이후로는 항상 최 감독 옆에 서서 그 분 지시에 따라 분신처럼 움직이는 역할을 했다. 그 때 연출부에는 이미 홍성기 감독이 조감독으로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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