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오후6시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주말을 맞아 명동ㆍ롯데백화점 등으로 나들이 나온 시민들과 퇴근 인파로 붐볐다. 지하철역 구내 중앙에 이날 문을 연 카페에는 커피 등을 사려는 사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카페 뒤편에 있는 공연장에서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의 공개방송이 진행돼 오가는 사람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구석에는 노숙인들이 자리를 잡고 잠을 청하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명동상권의 수송로 역할을 하고 있는 을지로입구역 한가운데 25일 상업시설인 카페와 공연장이 들어서면서 이 일대 풍속도가 바뀌고 있다. 시민단체와 노숙인들은 "서울 도심에 또 한 곳의 설자리를 잃었다"며 안타까워하는 반면 상인들은 "주변이 말끔해졌다"며 환영하는 분위기다.
카페 등이 위치한 자리는 원래 만남의 광장이 있던 곳으로 노숙인들이 많이 모이는 거점이었다. 노숙인들이 원형으로 이루어진 광장 경계에 자리를 잡고 기대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카페 등을 만들기 위한 공사를 시작하면서 노숙인들은 중앙 광장에서 후미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만남의 광장은 노숙인 봉사단체들이 음식 등을 나누어 주는 장소이기도 했다. 매일 자정께 이 곳에서 노숙인에게 국밥 등을 주는'거리의 천사들'윤건 총무는"광장이 없어지면서 이곳을 찾는 노숙인이 줄었다"며 "예전에는 150명이 식사를 했는데 공사 후로는 절반 정도인 80명만 모습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광장이 있을 때는 둘러앉아 밥을 먹으며 상담도 할 수 있었는데 그럴 수 없게 돼 아쉽다"고 말했다.
이 곳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행동하는 양심'은 아예 활동장소를 옮겼다. 일주일에 세 번씩 광장에서 노숙인에게 밥과 간식을 제공했는데 공사가 시작된 후 을지로입구역 5번 출구 밖에서 음식을 나눠준다. '행동하는 양심' 문관식 대표는 "몸이 아픈 노숙인들은 나오기 어렵기 때문에 저희가 지하로 배달을 하는데 아무래도 춥거나 비가 올 때는 불편하다"고 말했다.
상당 수 노숙인들도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을지로입구역에서 만난 큰 가방을 맨 노숙인은 공연장에 써 있는 '이 공연장은 시민을 위한 공간입니다'라는 문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시민을 위한 공간이라며 지들 맘대로 이러면 안되지"라고 언성을 높였다. 수염을 길게 기른 노숙인은 "괜찮아, 난 옮길 거야"라고 말했다.
노숙인 사이에서는 지난해 G20 행사 때문에 노숙인이 많이 찾는 광장을 없애고 카페를 만들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이에 대해 서울메트로 측은 "지하상가 개발의 일환으로 2010년 1월 업체와 계약을 했고 G20 행사가 끝난 11월15일부터 공사를 시작했다"며 "근거 없는 소문일 뿐"이라고 밝혔다.
주변 상인들 반응은 긍정적이다. 지하 화장품 매장의 점원은 광장 대신 카페가 생긴 것에 대해"어쨌든 깔끔해져서 좋다"고 말했다. 을지로입구역을 이용해 출퇴근하는 회사원 유모씨는"관광객도 많이 다니는 장소인데 노숙인들이 한가운데서 자는 모습이 사실 보기 안 좋았다"고 말했다. 회사원 김모씨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노숙인들 쉴 곳이 없어져 안됐다"고 말했다.
한편 을지로입구역 지하통로를 심야시간에는 아예 폐쇄하는 방안도 추진 중이다. 을지로입구역관계자는 "지난해 횡단보도가 설치됐기 때문에 지하통로를 24시간 개방하지 않아도 된다"며 "지하철이 다니지 않는 시간에는 계단에 셔터를 내릴 계획"이라고 밝혔다.
류호성기자 rh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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