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그라 같은 발기부전치료제는 몸에 들어가면 PDE5라는 단백질에 달라붙는다. 세포 안에 들어 있는 이 단백질은 혈관을 확장시키고, 비아그라는 이를 돕는다. 처음엔 비아그라가 PDE5와 정확히 어떻게 결합하는지 몰랐다. 두 물질의 결합 구조가 처음 밝혀진 건 2003년. 국내 벤처기업 크리스탈지노믹스가 영국 과학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유전자(DNA)의 나선 방향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바뀌는 중간형태와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HIV) 바이러스를 억제하는 단백질의 구조도 국내 과학자들이 각각 2005년과 2005년 밝혔다. 둘 다 역시 저명 학술지의 표지를 장식했다.
이들 성과 뒤에는 모두 포항방사광가속기가 있다. 1991년부터 우리 과학 발전에 크게 기여해온 이 장비가 요즘 세대교체 중이다. 2014년이면 4세대 방사광가속기가 완공된다.
태양빛의 1억 배
포스텍의 3세대 방사광가속기는 지난 12월 해체돼 3.5세대로 업그레이드 중이다. 방사광을 만들어내는 삽입장치가 들어갈 공간이 늘고, 전자빔 크기는 작아진다. 1,000억원 들여 진행되는 업그레이드가 2011년 끝나면 방사광은 100배 밝아지고 실험시간은 10배 단축된다.
전하를 띤 입자가 빠른 속도로 움직이다 방향을 바꾸면 강한 빛이 발생한다. 이 빛이 바로 방사광이다. 포항방사광가속기는 전자뭉치(전자빔)를 총으로 쏘아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시켜 방사광을 낸다. 전자가 가속되는 구간에는 전자석이 깔려 있다. 자력을 걸어 전자가 요동치며 방향을 계속 바꾸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곳이 바로 삽입장치다. 3세대 가속기는 삽입장치를 넣을 수 있는 공간이 10개였다. 3.5세대는 20개다.
전자빔은 작으면서 전자가 많이 들어 있을수록 성능이 좋다. 같은 부피의 전자빔에 전자를 많이 압축해 넣어야 방사광이 많이 나온다. 따라서 단위부피당 빛의 세기가 강해진다. 같은 부피에 빛이 적을수록 사방으로 퍼진다. 3세대 가속기가 내는 방사광은 태양빛보다 100만~1억 배 밝다.
전자빔 크기는 보통 단면적으로 얘기한다. 빛으로 사물을 보려면 그 사물보다 빛의 단면적이 작아야 한다. 방사광을 내는 빔 크기보다 작은 사물은 볼 수 없다는 소리다. 3세대 가속기의 전자빔은 대략 머리카락 만하다. 단면적의 지름이 50~100㎛다. 3.5세대는 50㎛ 정도로 좀 더 작아진다.
결국 3세대나 3.5세대 가속기로는 50㎛보다 큰 물질만 분석이 가능하다. 단백질 같은 생체물질은 대부분 이보다 작다. 때문에 단백질 여러 개를 뭉쳐 결정 형태로 만들어 관찰해야 한다. 이문호 포스텍 포항가속기연구소장은 "결정으로 만들 수 있는 단백질은 10% 정도밖에 안 된다"며 "4세대 가속기가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고 말했다.
펨토초 세상 여는 4세대
4세대 가속기는 빔 크기가 10㎛까지 줄어든다. 단백질 분자 하나도 들여다볼 수 있다. 또 3세대보다 작은 빔에 전자를 더 많이 압축시키기 때문에 방사광이 3세대보다 100억 배나 밝다. 삽입장치 길이는 100m(3세대 2m)로 확대된다. 수많은 전자들은 긴 통로를 지나며 방사광을 내다 정렬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여기선 한 파장의 강한 방사광이 펨토(1,000조분의 1)초마다 딱딱 끊어지면서 나온다. 적외선부터 X선까지 넓은 영역의 파장을 가진 빛들이 섞여 연속적으로 나오는 3세대와 전혀 다르다. 3세대는 실험에 필요한 특정 파장의 빛을 단색광장치(프리즘)으로 뽑아내 쓴다.
4세대 방사광을 이용하면 수백 펨토초 동안 일어나는 자연현상도 직접 관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광합성이 한번 일어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350펨토초다. 백성기 포스텍 총장은 "말이 달리는 동안 아주 짧은 시간마다 연속적으로 사진을 찍으면 육안으론 안 보이던, 네 발이 모두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을 포착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라며 "4세대 가속기로는 수소와 산소가 만나 물이 되는 중간과정도 보인다"고 말했다. 3세대론 불가능했던 살아 있는 세포의 실시간 관찰도 4세대론 가능하다.
현재 4세대 방사광가속기를 가동하는 나라는 미국뿐이다. 일본은 지난해 완공해 시운전 중이고, 유럽연합(EU)과 스위스는 건설 중이다. 영국과 스웨덴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폴란드 중국도 건설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는 올해 설계를 마치고 2011년 첫 삽을 뜰 예정이다.
가속기 각축전
현대과학은 점점 더 작은 물질을, 더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확인하려고 한다. 이런 추세 덕분에 세계적으로 가속기 같은 거대과학장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전자 말고 양성자나 중이온을 이용하는 가속기가 추가로 들어선다. 방사광가속기가 가속시킨 전자에서 파생되는 방사광을 쓰는데 비해 양성자나 중이온가속기는 가속시킨 입자를 그대로 활용한다.
수소원자에서 전자를 뗀 이온(양성자)을 물질에 쏘여 물질을 변화시키는 양성자가속기는 의료용, 산업용 방사성동위원소 생산, 반도체 제조, 암 치료 등에 쓰인다. 중이온가속기는 양성자보다 무거운 헬륨이온, 탄소이온, 우라늄이온 등을 가속시켜 암을 치료하고 신물질이나 신품종을 개발한다. 중이온가속기는 부산 동남권의학원(2016년)과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에, 양성자가속기는 대전 한국원자력연구원(2012년)에 지어질 예정이다.
임소형기자 precar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