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집 마련 꿈 접은지 오래, '전세사수'의 꿈조차 버겁기만…연봉 이상 오른 보증금에 대출받고 허덕허덕"투잡해도 월세에 등골" "더 외곽으로…" 체념
서울 구로동 85㎡짜리 아파트에 전세로 사는 대리운전 기사 강일만(가명ㆍ44)씨는 얼마 전 집주인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았다. 1억7,500만원인 보증금을 무려 5,000만원이나 올려달라는 것이었다.
사정도 해보고 호소도 해봤지만 집주인은 요지부동. 결국 추가 대출에 친지로부터 빌려 돈을 합쳐 간신히 계약서에 도장은 찍었지만,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다. "내 집 마련은커녕 이젠 전세도 버거워요. 대출이자를 내려면 어떻게든 더 일을 해야겠지만… 뭔가 나아질 것이란 희망이 전혀 보이질 않습니다."
주택보급률 101.2%. 숫자로만 본다면, 우리나라 국민 1인 당 집 한 채씩은 갖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사철을 맞은 지금 서울과 수도권 도시 곳곳에선 천정부지로 치솟은 전세금을 감당치 못해, 눈물 흘리며 싼 곳을 찾아 다니는 '전세난민'들이 떠돌고 있다.
서너 식구 살만한 엔간한 수도권 아파트라 치면, 적어도 3,000만원이고 많게는 억(億)단위까지 보증금이 올랐다. 어지간한 직장인의 연봉 이상을 전셋값으로 올려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대출뿐. 있는 빚에 빚을 더해 잡거나, 그게 안되면 살던 곳에서 밀려 나와 외곽을 겉도는 난민 신세가 되는 것이다. 작년 말 현재 대한민국 전체 가구 가운데 전세나 월세(반전세로 불리는 보증부 월세 포함)로 사는 가구는 약 40% 수준(670만~680만가구)으로 추산된다.
설령 전세나 월세를 구했다고 끝은 아니다. 보증금 마련을 위해 빌린 대출금의 이자를 내기 위해, 혹은 보증금을 올려주지 못해 대신 선택한 월세를 내기 위해, 고통은 그 때부터 시작된다. 월급의 절반 가량이 아이들 학원비로 나가는 현실에서, 또 하나의 고정지출이 생긴다는 것은 곧 '적자'가계부를 의미한다.
경기 평촌에서 보증금 1억500만원에 전세를 살던 회사원 최규원(36)씨는 집주인의 요구로 보증부 월세(이른바 반전세)로 최근 재계약을 했다. 이미 받은 은행대출(2,800만원) 이자 월 9만5,000원 외에 월세 30만원을 더 내야 할 상황. 230만원 월급에 용돈 30만원, 부모님 용돈 20만원, 교통ㆍ통신비 30만원, 보험ㆍ이자 25만원, 기타 생활비 100만원 정도를 쓰는데 월세까지 내면 앞으로는 마이너스다. 집계약 1주일 후부터 최씨는 퇴근 후 대리기사로 뛰고 있다. 그는 "올해엔 2세를 가지기로 했는데 아내에겐 미안하지만 가계 사정도 그렇고 계획을 조금 더 미뤄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정부는 전세보증금이 계속 오르면 전세수요자들이 아예 집을 구입하는 쪽으로 선회, 전세대란이 어느 정도 잡힐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대책도 매매수요를 촉진하는 쪽에 맞춰져 있다. 하지만 지금 신음하는 '전세난민'들은 주택구입여력이 있는데도 전세에 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지난달 아파트 전세에서 보증부 월세로 재계약을 한 서울 신길동의 송원이(39ㆍ여)씨는 이제 은행엔 이자로, 집주인에게는 월세로 매달 60만원을 내야 한다. 없던 월세부담이 35만원이나 늘어난 것이다. "집 없는 서민들에게는 언젠가 번듯한 아파트 하나 갖는 게 소원이잖아요. 그거 하나 보고 저축도 하고 한푼 두푼 쪼개 쓰며 모으는 건데 이젠 정말 길이 안 보이는 것 같아요."
사실이 그렇다. 집값은 한참 뛰어 있지, 전셋값은 1년 연봉보다 더 오르지, 여기에다 월세까지 내고 나면 제자리걸음, 아니 뒷걸음질이다. 그나마 전세로 살 때는 올려줘도 언젠간 받을 돈이니 강제로 저축한다고 여긴다지만, 매달 없어지는 월세는 내는 만큼 내 집 마련의 길은 멀어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젠 '내 집 마련의 꿈'이 아니라 '전세사수의 꿈'으로 바뀌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전태훤기자 besam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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