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일본 코베 대지진 때의 일이다. 땅이 갈라지고 고가도로가 넘어지는 아비규환의 현장에서도 일본 언론은 질서를 지키는 시민들의 모습을 집중 보도했다. 이에 따라 세계 언론은'죽음 앞에서도 질서를 지키는 국민'으로 치켜세웠다. 재난 상황에서도 일본 언론은 국격을 중시했다.
사안의 성격은 다르지만, 인도네시아 대통령 특사단이 묵던 호텔에 국정원 직원들이 첩보 활동을 위해 잠입했다는 보도는 국민의 알 권리와 언론의 책임을 새삼 되돌아보게 한다. 우리 언론의 떠들썩한 보도에 '춘치자명(春雉自鳴)'이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렸다. 어느 봄날, 어리석은 꿩이 밭에서 콩을 훔쳐 먹으면서 공연히 내지 않아도 될 소리를 내는 바람에 포수에게 들켰다는 이야기이다.
보도된 대로 국정원 직원들이 고등훈련기 수출을 위해 인도네시아의 협상전략을 빼내려 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설령 그렇더라도 우리 언론이 국익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일을 요란하게 떠들며 진상을 파헤치려는 목적이나 이유를 납득하기 어렵다. 경위가 어찌됐든 인도네시아 측이 "별 것 아닌 일로 잠시 오해가 있었다"고 밝힌 마당에는 더욱 그렇다.
언론이 중시하는 국민의 알 권리와 국가 안보 또는 국가 이익은 '자연스러운 절충'이 이루어져야 한다. 국가는 안보와 국익을 이유로 언론의 눈과 입을 막아서 안 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언론 역시 국민의 알 권리만을 내세워 국가 안보와 국익에 반하는 사항까지 낱낱이 공개하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샛강들이 흘려 보내는 온갖 오염물질을 스스로 걸러내면서 도도히 흐르는 한강처럼, 언론도 국익을 돌보면서 국민의 알 권리도 보호하는 절제와 자정(自淨)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인도네시아 특사단 사건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국익을 해치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부와 관련부처가 외교적으로 조용히 수습하는 것을 지켜보는 자세가 애초 바람직했다. 이런 성숙한 사회와 언론의 덕목이 열악한 안보 환경에서 건강한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나가는 지혜일 것이다.
이번 소동은 천안함과 연평도 도발 때의 아쉬움과 그 교훈을 되새기게 한다. 북한은 비대칭 군사력 뿐 아니라 정치ㆍ사회 체제의 비대칭성도 적극 악용하고 있다. 북한은 '수령님 말씀'외에 이견이 있을 수 없고 정부를 견제하는 언론도 없는 특수한 사회이지만, 한국은 숱한 이견과 논쟁이 존재하는 다원적 민주사회이다. 이런 비대칭성 때문에 천안함 사태 직후 인터넷 공간에 난무한'진상 조작설'은 안보 전문가들에게 악몽으로 남아있다. 난해한 사건의 진위를 정확히 판단할 지식과 안목을 갖추지 못한 일부 젊은 네티즌들이 발원지가 어디인지 제대로 살피고 고민하지도 않은 채 터무니없는 갖가지 음모설과 유언비어를 확산시켰던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 때문에 심각한 국론 분열을 겪었다. 그리고 6개월 뒤 북한은 다시 연평도에 무차별 포격을 가하는 도발을 저질렀다.
물론 천안함 사건에서 국민이 의문을 가질 만한 점은 있었다. 그러나 일부 언론은 객관적 검증보다는 무턱대고 군과 정부를 질책하는 데 매달렸다. 이 과정에서 함정 설계도, 해군 작전상황 등을 여과 없이 보도했다. 연평도 사태 때도 그랬다. 우리 군의 무기 배치와 성능 등이 상세히 보도되었고, 감청 정보도 그대로 흘러나왔다. 군 관계자들이"북한은 간첩을 보낼 필요가 없다"고 푸념할 정도였다. 알 권리와 국익을 늘 신중하게 교량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김태우 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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