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강병태 칼럼] '예능 사회'와 비디오크라시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강병태 칼럼] '예능 사회'와 비디오크라시

입력
2011.02.21 12:10
0 0

서울대 음대 교수의 제자 폭행 논란이 온갖 추잡한 스캔들을 쏟아냈다. 발성법을 가르치면서 배를 때리거나 머리를 잡고 흔들기 일쑤라고 제자들이 세상에 고발했다는 기사를 처음 읽을 때만해도 솔직히 의아했다. 제 자식이나 군대 졸병도 그리 막 다룰 수 없는 시대에 고상한 음대 여교수가 제자들을 '상습 폭행'했다니 곧이 믿기 어려웠다.

본인은 그 바닥 특유의 도제식 교육을 남달리 열정적으로 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자신도 훌륭한 스승에게 그리 교육 받았다고 주장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자존감 높은 요즘 젊은 세대가 인격적 모욕을 참다 못해 들고 일어섰다면 이런저런 변명은 구차하다. 더욱이 같은 스승에게 배운 동료 교수들이"우리 선생님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공개적으로 그 교수를 나무란 마당이다.

대중적 영웅 신화에 열광

폭행 논란은 그렇다 치고, 자신의 공연 티켓을 강매하고 시어머니 팔순 잔치에 제자들을 불러 노래하고 춤추게 했다는 폭로는 낡은 사회 관행과 통념에 비춰 시비를 가리기 모호한 구석이 있다. 연주회 출연 대가 등으로 값비싼 선물을 요구했다는 고발도 그렇다. 그러나 한 학기 12번씩 하게 돼 있는 개인별 레슨을 한 두 차례만 하고는 규정 횟수를 다 채웠다고 거짓으로 기록하게 한 것은 명백한 불법행위이다. 음대 입시 실기시험을 치르는 강당을 수업 명목으로 빌려 입시를 앞둔 자기 딸의 연습에 썼다는 폭로에 이르면 파렴치성은 한층 뚜렷해진다.

그래 보았자, 사소한 추문일 수 있다. 징계위원회를 소집한 대학도 그리 판정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되든 이 여교수는 우리 사회의 유능한 이들이 흔히 서로 공모하고 은폐하는 일상적 비리와 악덕을 빠짐없이 실행하고 단맛을 즐긴 모습이다. 겉보기 존경할 만한 성공적 삶에는 오만과 탐욕, 부도덕과 파렴치가 덕지덕지 끼었다.

개인의 타락과 위선을 마냥 개탄할 생각은 없다. 그런데도 굳이 길게 논한 것은 대중 매체, 특히 TV 방송이 주도하는'예능 만능'세태와 무관치 않은 듯해서다. 이 여교수는 요즘 대유행인 스타 발굴 프로그램에 멘토로 출연하면서 스스로 스타가 됐다고 한다. 물론 '뉴욕타임스가 격찬한 세계적 소프라노'라는 이에게 고작 예능프로그램으로 떴다고 말하는 것은 무지몽매한 결례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이 프로그램을 주목하는 것은 그가 음치들을 애써 가르쳐 훌륭하게 노래하게 하는 '기적'을 이루고 함께 눈물 쏟는 감동을 연출한 때문이다.

이게 그의 비리와 악덕을 인내한 제자들이 뒤늦게 스승을 세상에 고발한 동기가 된 게 아닐까 싶다. '나쁜 선생'이 예능프로그램의 얄팍한 스타 만들기, 대중적 영웅 신화 조작을 통해 '훌륭한 스승'으로 널리 공인되는 것은 차마 그냥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할 만하다. 그 때문에 숨겨졌던 비리와 위선이 폭로됐다면, 이 것도 예능의 힘으로 봐야 할까.

며칠 전, 어느 동업 논객은 사회가 온통 연예, 예능에 쏠린 현실을 개탄했다. 나는 우연하게도 그 즈음 국제뉴스가 된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의 섹스 스캔들을 떠올렸다. 엉뚱한 연상(聯想)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미디어 재벌 베를루스코니가 갖가지 범죄와 부패, 섹스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3차례나 집권한 바탕은 우리 사회가 TV가 주도하는'예능 사회'로 치닫는 근본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국민 의식과 정치 타락시켜

외부세계는 흔히 베를루스코니가 TV 등 대중 매체와 여론을 조작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이탈리아의 냉철한 지식인들은 국민 스스로 TV 방송이 만드는'꿈과 성공' 신화에 열광하는 현실이 문제의 근본이라고 본다. 젊은 '국민 작가'로베르토 사비아노는 최근 독일 언론 기고에서"개인의 정직과 진실성, 사회 정의 등과 무관한 비디오크라시(Videocracy)가 국민 의식과 사회와 정치를 타락시켰다"고 지적했다. 언뜻 비약으로 들릴지 모르나, 우리 사회와 정치의 혼돈도 TV가 앞장선 비디오크라시 탓이 크다.

강병태 논설위원실장 btkang@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