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민주화 시위를 보는 미국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간다.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으나 뾰족한 해법이 없기 때문이다. 미 행정부의 외교ㆍ안보 수뇌진은 20일 잇달아 논평을 냈지만 ‘사태가 악화돼서는 안된다’는 원론적인 입장에서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월스트리트저널에 “자유를 수호해야 한다”고 했고,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은 ABC 방송에서 “바레인의 폭력사태가 종식돼야 하며 민주적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는 표명에 그쳤다. 수전 라이스 유엔대사는 “평화적 시위가 존중돼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와 무력진압을 시도하는 정권 사이에서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시위대의 손을 들어 정권이 무너졌을 경우 정국 향방에 대한 판단에 확신이 없어서다. 1979년 이슬람혁명으로 친미 팔레비 왕조가 무너진 뒤 30년이 넘도록 중동에서 반미 교두보의 입지를 탄탄히 하고 있는 이란의 악몽이 재현될지 모른다고 우려하는 것이다. 클린턴 장관이 이란 혁명이 민주정부로 귀결되지 않은 것을 거론하며 “중동의 민주주의 이행 과정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은 미국의 속내를 잘 보여준다. 중동 각국 정부에 “시위대가 수용할 수 있는 개혁을 즉각 시행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요구하는 것도 그것이 친미정권을 존속시키면서 민주주의의 대의를 외면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차선책이라 본 때문이다. 마이크 멀린 합참의장이 이날부터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연합 카타르 쿠웨이트 등 중동의 핵심 우방을 순방하는 것은 시위가 이들 국가로 확산될 경우 또는 예방적 차원에서 정부의 개혁조치를 미리 다짐받아 놓으려는 성격인 것으로 전해졌다.
미 국무부가 이집트 사태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정권을 비호하는 듯한 입장을 취해 비난 받았던 것과 달리 바레인, 리비아 시위에서 정권에 개혁조치를 강력히 요구한 것은 다소 진전된 것으로 평가되지만, 독재정권에 대한 판단에 유보한 것은 여전히 한계로 지적된다.
미 언론들은 “이스라엘 안보와 대테러전쟁, 석유 등 첨예한 이해관계가 걸려있다 보니 미국이 운신하는데 한계가 있다”며 “지정학적 안정을 우선시한 미국의 중동정책 토대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워싱턴=황유석특파원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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