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산과 황상의 '질박한 師弟의 情' 어디로 갔나
사제 간의 정리(情理)가 실종됐다. 교권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 지 오래고, 스승과 제자 사이엔 존경과 사랑이라는 단어조차 찾기 어렵게 됐다. 진정한 스승도, 진정한 제자도 없다. 최근 세상을 시끄럽게 한 서울대 음대 교수의 학생 폭행 논란을 보면 그런 느낌이 더 든다.
대표적인 인문학자로 꼽히는 정민(51) 한양대 교수는 이런 현실을 개탄한다. '삶을 바꾼 만남' 이라는 제목으로 네이버의 문학동네 카페(http://cafe.naver.com/mhdn)에 마련한 온라인 강의를 통해서다. 국내 최초의 온라인 연재 방식의 인문학 강의다. 그는 지난달부터 매주 월요일 오전 11시면 어김없이 온라인 카페에 강의록을 띄운다.
이 시대의 사제 관계에 대한 그의 평가는 냉혹하다. "학생은 있어도 제자는 없다. 물질적인 교환가치에 의한 거래만 남았다. 마음으로 오가던 질박한 정은 찾아볼 길 없게 됐다."
'삶을 바꾼 만남'의 주인공은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개혁가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과 그의 강진 유배 시절 애제자 황상(1788~1870)이다. 시골 아전(衙前)의 자식이었던 황상이 다산을 만나 당대의 최고 시인 중 한 명이 되는 과정이 그려진다. 하지만 메시지는 만남이 아니다. 추락한 사제의 정을 회복하는 것이다. 정 교수는 "두 사람 사이에 이어진 도탑고 진실한 관계를 오늘의 사제들에게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부지런하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라'는 다산의 삼근계(三勤戒)에 따라 한눈 팔지 않고 평생 공부에 몰두하면서 스승을 존경해온 황상의 자취야말로 진정한 사제의 정리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정 교수는 황상을 '눈물나는 사람'이라고 했다. 족히 수십 명은 넘었을 다산의 강진 제자 중 그만큼 스승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학문에 대한 요구를 묵묵히 받아들인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산은 매우 까다로운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제자들에 대한 비판은 가혹했다. 이런 엄한 훈육을 견뎌낸 유일한 제자가 황상이었다. 황상은 훗날 장안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인정한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정 교수는 황상의 일관됨을 주목했다. "다산의 제자들은 많았지만 끝까지 스승을 섬기면서 학문에 정진한 경우는 황상뿐이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끊임없는 학업의 매진을 독려하면서 채찍을 휘둘렀는데, 황상이 유일하게 버텼다. 다른 제자들은 다산에게 등을 돌렸다."
왜 그랬을까. 정 교수의 해석은 이렇다.
"제자들이 다산에게 원했던 것은 오직 과거에 급제할 수 있도록 도움을 달라는 것이었지만 다산의 생각은 달랐다. 과거 급제가 학문의 전부는 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다산은 제자들에게 학문에 대한 자세를 강조하는 등 기본에 충실할 것을 먼저 가르쳤다. '삼근계'가 토대였다. 황상만 이런 뜻을 잘 읽고 따랐다. 다른 제자 중 일부는 심지어 다산에 흉기를 겨누기도 했다는 기록도 있다. 과거급제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다. 요즘 현실을 묘하게 떠올리게 한다."
한 20대 여성 독자는 황상이 스승의 요구에 충실한 반면 주체성이 떨어지는 게 아니냐고 반문했다. 정 교수는 "황상도 다산의 교육방식에 불만을 가졌을 법한 대목이 여럿 나와있다. 그러나 결국엔 스승의 가르침이 옳다는데 다다른다. 이런 에피소드가 있다. 황상이 결혼 후 아이를 낳고 학문을 게을리하자 다산은 편지를 보내 크게 꾸짖었다. '너의 모습과 행동을 보니 태만하기 짝이 없구나. 어리석고 안타까운 마음이다. 진심으로 공부하지 않는다면 단명할 수도 있다. 학문은 그런 것이다'라고. 황상은 스승의 편지에 예전의 그로 돌아갔다. 이게 진정한 사제의 정리라는 거다."
18년이나 이어진 강진 유배를 마치고 다산이 서울로 올라온 뒤 많은 제자들이 그의 집을 기웃거렸다. 출세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가장 아꼈던 제자 황상은 10년 동안 단 한번도 스승을 찾지 않았다. "다산이 입버릇처럼 말해온 '은자(隱者)의 삶'을 실천했던 것이다. 출세를 위한 학문은 실패로 귀결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따랐던 것이다. 이게 전부다. 시골에서 죽으라고 공부하면서 한시를 익히는데 매달렸을 뿐이다. 그런 황상이었지만 다산이 76세 때, 스승의 결혼 60주년을 축하하려고 17일 동안 걸어 서울로 올라갈 만큼 스승을 향한 존경은 유별났다. 그런 그를 보고 다산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
정 교수는 황상이 다산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180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시골 아전의 자식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평범한 삶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했다. "다산이 유배오자 15세 소년 황상은 용기를 내 그의 서당을 찾았다. 글을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저는 머리도 나쁘고, 앞뒤가 꽉 막혔고, 분별력도 모자랍니다. 저 같은 아이도 공부할 수 있을까요'라고 했다. 주눅 든 소년에게 다산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격려했다. 다산과 황상의 첫 만남은 그래서 '맛난 만남'이었다. 다산은 일관된 가르침을 주었고, 제자는 한결같은 자세로 받아들였다. 다산도 위대하지만, 제자 황상도 이에 못지 않은 내공을 갖췄던 것이다. 황상이 있음으로써 다산이 더욱 빛났다."
이 부분을 독자들은 특히 주시했다. "그런 스승이 있어서 부럽다"는 댓글이 수두룩했다.
다산은 황상에게 올바른 학문의 길만 제시한 게 아니었다. 효의 중요성 역시 간과하지 말도록 채찍질했다. "다산이 어느 날 보낸 편지를 보면 제자에 대한 꾸짖음과 무한사랑이 그대로 녹아있다. 황상이 부친상을 당한 뒤 사흘장만 하고 집에 돌아간 것을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고작 사흘만 아버지 곁을 지키다 귀가한 니가 밉다. 이 xx야'."
다산은 황상을 정신적으로 단련시켰으면서도 틈 날 때마다 격려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황상이 17세 때 학질에 걸렸다. 어른도 소리치며 끙끙 앓는 학질에 걸렸지만, 황상이 꼿꼿하게 붓을 잡아 초서(抄書) 작업을 하는 것을 본 다산은 '이런 기상으로 계속 공부한다면 훗날의 성취를 말할 필요도 없겠다'고 칭찬했다."
정 교수는 다산과 황상의 질박한 정을 통해 우리가 까맣게 잊어버렸던 소중한 사제 간의 풍경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나기를 바란다고 했다. "스승과 제자가 거래를 하는 세태가 안타깝다. 마음으로 오가던 사제 관계는 어디 갔는가."
■ "사제간은 불가근 불가원 이익도 기교도 있어선 안돼"
정민 교수는 누구나 삶을 바꿀 만남이 찾아온다고 믿고 있다. 다만 다산과 황상의 만남처럼 '맛난 만남'을 누리는 것은 흔하지 않은 법. 사제지간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정 교수는 "상처를 주는 만남은 왜 그리 많은지"라며 "사제가 서로 미덕을 발휘해야 삶을 바꿀 수 있는 만남으로 승화된다"고 말했다.
_다산과 황상의 관계가 왜 '삶을 바꾼 만남'의 소재가 됐나.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면 사제간 신뢰와 존중이라는 핵심 가치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스승의 제자 교육, 인간의 만남에 대한 정의를 둘의 관계를 통해 조명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지극히 사무적인 우리 세대의 사제관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지않은가."
_사제 간 정리가 떨어진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요즘 시대의 스승은 지혜를 가르침으로써 삶의 맥락을 짚어주는 존재가 더 이상 아니다. 지식과 정보를 전달해주는 기능적 측면의 지식전수자일 뿐이다. 기능면에서 뛰어나야 좋은 교사다. 그래서 학원 강사가 더 대접받지 않는가. 1개 반 40명 중 30명의 학생이 잠을 자도 교사가 버젓이 수업하는 현실은 너무 비극적이다. 지혜의 영역이 지식의 영역으로 급전직하한 것이 우리 교육이다. 학교 교육이 무너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대학도 마찬가지 아닌가.
"대학은 인성의 부재가 심각하다. 연구비를 많이 따오거나 논문을 많이 쓴 순서가 우수 교수 평가의 잣대다. 인문학이 사회나 대학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아예 논외다. 기능적인 상벌체계는 정말 곤란하다. 교수들에게 학생들을 취직시키는 취업중개자 역할만 강조되고 있다."
-기억나는 제자는 있나.
"사제 간 도타운 만남, 맛난 만남은 서로 노력하고 만들어가야 한다. 사제라는 게 정말 어려운 관계다. 너무 가까이 해도 문제다. '불가근(不可近) 불가원(不可遠)'이 딱 어울린다. 중요한 것은 일방적인 관계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도탑고 질박한 정이란 무엇인가.
"이익을 따지지 말아야 한다. 기교가 들어가서도 안 된다. 시쳇말로 단순 무식해야 한다는 뜻이다. 황상이 그랬다. 스승이 시키는 것은 게으름 없이, 기교 없이, 이기적인 생각이나 얄팍한 계산 없이 묵묵히 하는 것이 사제 간 도탑고 질박한 정의 출발이다."
● 정민 교수
▦1960년 충북 영동 출생
▦한양대 국문과 졸, 한양대 박사, 한양대 국문학과 교수(현)
▦, 등을 통해 한시의 깊이를 해박한 지식으로 풀어내고 그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작업을 해왔다. 최근엔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사유와 지식경영에 관심을 쏟고 있다. , 가 그런 유형의 책이다. 다산의 지식경영을 꼼꼼히 살핀 도 대표 저서다.
김진각 편집위원 kimjg@hk.co.kr
사진 김주성기자 poe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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