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立春)을 지나 벌써 모레가 우수(雨水)다. 계절이 바뀔 때 왠지 코 끝이 시큰하고 가슴이 뻥 뚫린 듯 서글퍼지는 사람이 늘어난다. 이처럼 계절을 탄다면 ‘계절성 우울증’일 가능성이 높다. 철이 바뀌면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신체반응이다. 하지만 이를 가볍게 여기고 방치하다 병이 깊어질 수 있다.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뇌 신경회로의 신경전달물질에 이상이 생겼거나, 다른 사람보다 엄격하고 완벽한 성격을 가졌거나, 사별 실직 같은 사회적 원인이 있으면 우울증이 생길 수 있다. 뇌 손상이나 뇌경색, 갑상선질환, 췌장암 같은 질환이 나타나기도 한다.
증상은 무기력감과 우울감, 불면증, 죄책감 등 정신적 이상 외에 식욕부진, 소화장애, 두통, 전신근육통, 가슴 열감ㆍ통증, 두근거림, 어지러움 등 다양하다. 우울증 환자의 10% 정도는 의심과 피해의식, 망상, 환청이 생기고, 극심한 심리적 혼란에 빠지기도 한다. 우울증을 이기려고 술이나 약물에 의지하다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아직 우울증에 특효약은 없고 보통 항우울제를 쓴다. 항우울제는 약물의 성분과 작용하는 메커니즘에 따라 3환계 항우울제, 선택적 세로토닌 흡수차단제, 새로운 항우울제 등으로 구분한다.
항우울제는 환자상태에 따라 처방된다. 예컨대 불면증이 있는 우울증 환자는 졸음이 오는 항우울제를 처방하고, 식욕이 없어 식사하기 힘들면 입맛이 당기는 약을 선택한다. 반대로 폭식이 동반되면 식욕이 떨어지는 항우울제를 처방한다.
항우울제를 먹어 증상이 호전돼도 최소 6개월 이상은 먹어야 재발을 막을 수 있다. 갑자기 약을 끊으면 약에 따라 구역질, 구토, 소화장애, 두통, 땀이 나기도 한다. 따라서 약을 중단할 때는 의사와 상의해 서서히 줄여 나가야 한다.
항우울제는 부작용이 심하다는 선입견 때문에 복용을 꺼리는 이가 많다. 하지만 이는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이다. 현재 처방되는 모든 항우울제는 공통되는 부작용도 있고 약에 따라 다른 부작용을 가지고 있다. 가장 흔한 부작용은 소화불량과 메슥거림, 입마름 등이며, 정반대 부작용이 나타나는 약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건강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약물 고유의 효과다. 특히 최근 항우울제들은 부작용이 아주 적어 대부분 초기에만 나타나다가 계속 복용하면 사라진다.
약물치료 외에 심리치료와 자기장으로 뇌를 자극해 활성화함으로써 기분장애를 극복하는 경두개 자기자극술, 일정 시간 밝은 빛을 쪼여 뇌 신경전달물질의 균형을 잡는 광선치료 등 다양한 치료법이 나오고 있다.
숨은 우울증이 더 문제
증상이 뚜렷이 나타나는 우울증은 그나마 낫다. 더 큰 문제는 우울증이 있는데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가면 우울증이다. 스스로 기분이 우울하다는 걸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 눈에도 우울해 보이지 않는다.
가면 우울증상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대표적 증상은 두통 어지럼증과 같은 신경학적 증상, 목ㆍ어깨ㆍ허리 통증과 같은 골ㆍ근육계 증상, 불안 불면증 심계항진(심장이 빠르게 뜀) 등과 같은 생리적 각성 증상, 구역질 소화불량 과민성대장증상 같은 위장 증상, 잦은 오줌과 배뇨 불편감 같은 비뇨기 증상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별한 질환이 없는데도 이런 증상이 나타난다면 가면 우울증일 가능성이 높다.
가면 우울증이 가장 문제 되는 것은 청소년층이다. 청소년은 전형적 우울증상 대신, 일탈행위로 우울감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김기웅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는 “어른 눈에는 반항이나 방황으로 비출 수 있지만 실제로는 우울증 양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어린이 우울증도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갑자기 학습 능력이 떨어지거나, 안절부절못하거나, 무서움을 많이 타거나, 배나 머리 등이 아프다고 칭얼대거나, 따지기를 좋아하면 우울증을 의심해 봐야 한다.
다른 질환의 전조증상일 수도
우울증이 의심되면 빨리 병원을 찾아야 한다. 우울증 자체도 문제지만 다른 질환의 전조 증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울증이 나타나는 병은 매우 다양하다. 뇌종양이나 뇌염 등에서 초기 증상으로 우울증이 생길 수 있다. 갑상선기능저하증과 당뇨병, 뇌하수체 기능저하, 부신피질호르몬 저하 등 내분비 질환이 있어도 만성 무기력감, 에너지 저하, 우울감, 신체 통증, 신경과민 등 심한 우울증상이 그대로 나타난다. 우울증으로 오인해 병을 키울 수 있으니 유의해야 한다. 류마티스질환도 초기에는 우울증으로 오인되다가 나중에야 밝혀지는 사례가 종종 있다.
특히 알츠하이머병(노인성 치매)이나 파킨슨병 등에서는 질병 초기와 중기에 전형적으로 우울증이 나타난다. 반대로 우울증이 너무 심하면 인지 기능이 심하게 손상돼 치매(가성 치매)처럼 보일 수 있고, 행동이 느려지면서 파킨슨병과 유사한 증세가 생기도 한다.
두 질환을 구분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김어수 세브란스병원 정신과 교수는 “TV를 시청할 때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듯한데도 계속 보고 있다면 치매일 가능성이 높고, 재미없다고 보지 않거나 보다가 이내 싫증을 내고 그만두면 우울증일 수 있다”고 말했다.
치매를 우울증으로 오진해 우울증 치료에 흔히 사용되는 3환계 항우울제나 안정제를 투여할 경우 집중력이나 기억력이 떨어질 수 있다. 반대로 노인성 우울증을 치매로 오인해 약을 사용하면 나중에 고가의 인지기능개선제를 먹어도 우울증상이 호전되지 않고, 소화 장애와 불면 등 부작용으로 우울증상이 악화할 수 있다. 따라서 우울 증상이 나타나면 즉시 병원을 찾아 원인을 면밀히 검사하고 걸맞은 치료를 받아야 한다.
권대익 의학전문기자 dkw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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